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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금오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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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북 구미시 선산읍 유학길 593-31 (원리, 금오서원)
건립연도 1570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길재,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김종직
기타 서원

관찬사료

권49 22년 10월 5일,

이익운이 아뢰기를,
 "고려의 충신 길재를 금오 서원에서 치제(致祭)하던 날 도내의 유생 수천 명이 신에게 정단(呈單)하였는데 바로 길재의 시호(諡號)를 개정하자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 도신(道臣)이 진달한 데 따라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성리학은 정몽주와 길재에 의해 창도(唱導)되었고 그 문하에 이르러서 천명(闡明)되었습니다. 융경 초에 조사(詔使) 허국이 동방의 효열절의(孝烈節義)와 공(孔)·맹(孟)의 심학을 전수받은 사람에 대해서 물어 보았을 때 선정신(先正臣) 이황이 예관으로서 구별해 대답하면서 길재를 심학 쪽에 배치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길재가 이룩한 학문의 공이 절의보다 훨씬 비중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시호에 단지 충절만 거론한 것은 현인을 본받게 하는 의리에 부족한 점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고(故) 교리 정붕은 문경공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고 적전(嫡傳)이 되었는데 정밀하게 사색하며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일찍이 구용(九容)·구사(九思)의 조목에다 《단서(丹書)》에서 말한 경태(敬怠)의 분류를 부가해 책상 위에 그려서 붙여놓고 반우(盤盂)에서 경계한 뜻을 되새겼는데 선정신 이황이 그의 조예가 정밀한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목공 신 박영이 무인 출신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강학하자 정붕이 장려하고 타이르며 계발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문정공 신 김육이 지은 《기묘록(己卯錄)》에도 정붕의 사적이 실려 있습니다. 대체로 정붕은 기묘명현(己卯名賢)과 마음과 덕을 같이하였는데, 그만은 유독 물여우가 독기를 쏘아대며 몰래 엿보던 때에 장래의 일을 예견하고 초연히 멀리 떠난 결과 제거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금고(禁錮)되고 적몰(籍沒)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과 도는 기묘명현과 같았으니 그야말로 ‘살아서는 뜻을 같이 하고 죽어서는 같은 전(傳)에 실린다'고 한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날조된 모함에 걸려 들었던 선류(善類)들 거의 모두가 조가(朝家)로부터 포숭(褒崇)되는 의전을 받은 데 반해 정붕만 유독 빠졌던 것은 단지 그가 기묘년의 화적(禍籍)에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리고 선산의 금오서원은 바로 정붕을 연향(聯享)하는 곳이기도 한데 1묘(廟)의 5인 가운데 정붕만 시호가 없는 것도 조정의 흠전(欠典)이 될 듯하기에 감히 진달드립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李益運啓言 高麗忠臣吉再 金烏書院致祭之日 道內屢千章甫 呈單於臣 卽吉再改諡事也 昔在先朝 因道臣陳聞 賜諡忠節 而吾東性理之學 倡自鄭夢周吉再 及其門而闡明之 隆慶初 詔使許國 問東方孝烈節義孔孟心學之人 先正臣李滉爲禮官 區別以對 而以再置之於心學 蓋以再學問之功 尤重於節義故耳 諡號之只擧忠節 有欠象賢之義 令該曹稟處 從之 又啓言 故校理鄭鵬 受業於文敬公 金宏弼之門 得其嫡傳 精思力踐 嘗以九容九思之目 申之以丹書敬怠之分 作爲案上圖 以寓盤盂之戒 先正臣李滉 稱其造詣之精 文穆公臣朴英 出自弓馬 棄官講學 鵬將諭而啓發之 文貞公臣金堉所撰己卯錄 亦載鵬之事蹟 蓋鵬與己卯諸人 同心同德 而獨能逆覩於蜮弩潛伺之時 超然遠擧 而不入標榜之中 得免錮籍之禍 而其心與道 則與己卯諸人 眞所謂 生同傳死 同誌者也 善類之絓罹羅織者 擧蒙朝家褒崇之典 而鵬獨漏焉者 特其不載於己卯禍籍故耳 且善山之金烏書院 卽鵬聯享之所 而一廟五人之中 鵬獨無諡 恐爲朝家缺典 敢達請 令該曹稟處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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