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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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호계서원 |
명칭 | 『高山講話私箚』 |
문화재 지정 표기 | |
작성주체 | - |
작성지역 | - |
형태사항 | 크기: 장정: 수량: 재질: 표기문자: |
◦ 『高山講話私箚』, 1846, 『大山先生實記』 완성 후 교정작업을 마친 뒤 향음주례를 행하고 다음 날 設講기록, 병진년 호계서원에서 기록
[1846년/09월/14일] (丙午九月十四日)翼日[丙申]
行鄕飮酒禮于下齋。丈席爲主人。賓琴監察詩述。介金進士憲運。司正李進士秀應。介賓以下諸執事不盡錄。致儼猥忝擯相之席。鋪陳于前庭。主人以下序立于阼階下西面。賓介以下序立于門外西方。諸執事序立于門內北面東上。致儼進立于阼階之西西面。唱笏記。主人出門迎賓。至于堂上。獻酬旣畢。立司正以妨其倦怠爵無筭。以盡其殷勤揚觶讀法用開元禮文。以勵其不率讀約李晩慤。又進讀呂氏鄕約。聲音響亮淸越。聞者莫不灑然。斯禮之不講。久矣。是日也琴丈以淸名雅望。奄莅賓席。丈席以暮年筋力。式禮罔愆。遠近來觀者數百人。莫不聳然欽歎。
다음날 병신일에 향음주례를 하재에서 행하였다.
장석은 주인이 되고 빈은 감찰 금시술, 개介는 진사 김헌운, 사정은 진사 이수응이었다. 개와 빈 그리고 여러 집사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치엄은 외람되게도 빈상이 되어 앞마당에 포진하고, 주인이 하는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향하여 늘어서고, 빈개賓介 이하는 문밖의 서쪽 방향에 늘어서며, 여러 집사들은 문 안의 북면의 동상에 차례로 서고, 류치엄 자신은 조계의 서쪽에 나아가 서서 홀기를 창하고, 주인은 문을 나가서 손님을 맞이하여 당상에까지 와서 헌수를 마치고, 사정을 세워서 게을러지는 것을 막고, 작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양치하고 법령을 읽어서(개원 예문禮文을 사용함) 그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을 권면하게 하였다. 독약讀約은 이만각으로 정했는데 그가 앞으로 나아가서 여씨향약을 읽으니 그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아서 듣는 사람들이 시원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런 의례가 강의되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었다.
이 날은 금시술 어른이 청아한 명망으로 문득 빈객의 자리에 임하여 주셨고, 장석은 늙으신 몸의 근력으로도 예를 차리시어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원근에서 구경온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기뻐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46년/09월/15일] 又(丙午九月十五日)翼日[丁酉]
設講。執禮李進士。直日幼學權秉淵。進士柳致游。金鎭明。丈席出立于堂上楹間。列將講者于階下東西分首二隊。相向行揖禮。執禮進階上。勵聲讀白鹿洞規。諸生竦然肅聽。訖設席于庭中。丈席位於庭中近北南面。諸長老位於丈席左右。以次列序。諸生位於丈席前東西。相向重行。北上丈席以下皆卽席。一人執玉山講義。進讀于前。讀至于一心中仁義禮智各有界限。丈席問曰。所謂仁義禮智者。各爲一物。而各占界分耶。諸生不能對。丈席曰。性非有物。只是渾然一理而已。就其一理之中。以其溫和慈愛底而謂之仁。以其斷制裁割底而謂之義。以至於禮也智也。亦莫不以其節文。與是非底而得名。非是仁之外。又有所謂義與禮智者。別作名色。各占窠窟也。但於一理之中。分別其此是仁彼是義耳。正如人之一身。對父而言則謂之子。對子而言則謂之父。初非一身之中。父子之名。各占其地頭也。又讀至孔子只言仁。以其專言者言之云云。丈席曰。仁包四德。惻隱貫四端。亦有專偏之不同。致儼曰。仁與惻隱。雖有體用之別。體其爲專言。則惻隱之貫四端。初不異於仁包四德矣。恐不可曰。相對爲偏專。丈席曰。惻隱貫四端。因亦是專言。然其與仁包四德。不能無地頭之別也。仁包四德。以其渾然一理之中。燦然無所不備而言。惻隱貫四端。以其隨遇發見之際。自有始終微著而言。二者似不無橫豎之分。李丈秉殷曰。講義專言之仁。致文集四德說。反爲偏言之仁矣。致儼曰。講義說專言。是就未發上說。文集說專言。是就已發上說。所就而言之。雖有地頭之不同。然其以包四爲專言。則講義與文集。固未始有異也。李邁秀問孔門說仁。何以爲賢於堯舜歟。丈席曰。中與極。因是前聖相傳之訣。然只說道理公共名目而已。其於學者用工。似無端的可據之地。至孔門說仁。則▩(就)吾身親切處。指示其着緊下手之方。於學者。最有據依。這▩(豈)不是賢於堯舜者耶。柳致正問氣質自是本來所稟受一定者。何可以變易歟。丈席曰。偏塞者。因無可變之理。而得其正通之氣者。雖有昏濁之雜。然亦豈無證治之道耶。柳致儼曰。塞者牢不可開。而昏者可開而明之也。偏者終不可變。而濁者可變而美之也。故因有雖愚。而必明者矣。亦有雖柔。而必剛者矣。金丈養休曰。諸君莫問氣質如何。且當猛勇着力。痛切加工。使其濁者淸。駁者粹而已。其氣質之可變與不可變。因不必理會也。又讀至聖人敎人一段。致儼曰。始終本末。以工夫而言。精粗巨細。以道理而言。至於尊德性道問學。則當各致其功。而又在相爲用。故朱子於此。其論用工夫。則皆是兩下說去。如曰旣能尊德性。又曰便須道問學者。是也。其論收功處。則以交相資益。互相發明兩句。總結於下段者。是也。
講義旣畢。李晩慤進曰。小子等本無見識。且會事忽卒。無以從容討究。適間所言。亦不足爲備例發問矣。伏望丈席提出爲學緊要。指示其向方門路。則敢不持循服膺乎。丈席曰。某以不才。冒忝匪據。於分已濫甚矣。更何敢有所論說。以重不敏之咎。雖然諸生求益之誠。有不可孤。敢不略陳。因陋今番之會。以校實紀也。某不自量。已敢爲偏騭▩(誠)極僭踰。然其言則皆先生精醇之言。其文則皆及▩(門)高弟之所記也。遺事則於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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