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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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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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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호계서원
명칭 『雨皐文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金道行
소장정보

상세정보

◦ 『雨皐文集, 金道行, 書廬江講會錄後

을유년 봄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과 동지 여러분들이 이 서원에서 강학하였다.

 

지금 고찰하여 보니, 당일 회첩(會帖)에 유림의 석덕(碩德)과 일시의 명승이 많이 실려 있다. 정말로 사문의 성대한 모임이었다. 후래의 원임(院任)들이 다시 모임을 설치하고자 번번이 마음을 먹었으나, 차일피일하다가 이루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동량이 부러지는(선생이 서거하시는) 비통한 일을 당하고 보니, 이 일이 마침내 폐기되어 강론하지 않게 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고을의 장보(선비)들이 일이 있어 학교 안에 모였다가 학교의 교육이 폐기된 일에 섭섭한 마음을 일으켜, 옛 규약을 수복(修復)하려고 생각하고 서원의 여러 사람들에게 통문을 내어서 빨리 강회의 일을 거행하라고 독려하였다.

 

마침 도사(都事) 정내성(鄭來成) 군이 동주(洞主)가 되니, 이홍필(李弘弼) , 김시인(金始寅) 군이 섬학(贍學)의 일을 관장하여 기유년 716일에 강회를 시설하였다. 모인 사람은 2백여 명이었다. 동암(東巖) 유공(柳公)이 사실상 교석(敎席)을 맡아서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는데, 모두 7일 만에 파하였다. 강회를 파하면서 이우량(李宇亮) 군에게 책에다가 이름을 적도록 하였다. 역시 을유년 고사를 따른 것이다.

 

나는 삼가 생각건대, 법문(法門)이 무너지고 음회(音誨:스승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나날이 멀어지매 한 구역의 학자들이 경전을 끌어안고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탄식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 유공이 성심으로 제생을 가르쳐서 어른이든 젊은이든, 어진이든 어리석은 이든 할 것 없이 그 분량(分量)에 따라 각각 소득이 있게 하여 기쁘고 즐겁게 심복하여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이선생의 끼치신 교화가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볼 수가 있으니, 이 어찌 사문의 크나큰 행운이 아니겠는가?

 

금일 이후로 서원의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서의 규약을 저버리지 말고 매번 이 강회를 설치하여 초학자를 인도하고 통솔하여 권면하는 방도를 다할지어다. 그렇게 된다면 이 고을의 흥학(興學)의 성대함이 장차 원근에 명성이 있게 되어 나처럼 말석에 외람되게 끼어 있는 자도 역시 더불어서 행운이 있게 될 것이다.

 

저 본말(本末) 및 경중(輕重)의 변별과 권과(勸課) 및 강수(講授)의 절차는 분지(賁趾) 남선생(南先生:남치리)의 원규(院規)을유제명발(乙酉題名跋)에 다 밝혀 두었으므로, 여기서는 췌언을 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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