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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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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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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호계서원
명칭 『南嶽先生逸稿』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金復一
소장정보

상세정보

◦ 『南嶽先生逸稿, 金復一, 廬江書院呈文

()는 천하에 있어, 일찍이 없어진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에게 가탁함이 혹은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는 것이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이 태어나니 도가 비로소 행하였고, 공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가 태어나니 도가 그로써 밝아졌습니다. 주자(周子:주돈이), 정자(정이와 정호), 장횡거(張橫渠), 주자(朱子)가 그들을 이음으로써 도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가 사람에게 가탁된 것이었으니 만고를 거치더라도 고찰할 수가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 백 년, 천 년의 위로도, 뒤로 내려와 백 년, 천 년의 아래로도, 도가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행하는 것은 중국이라고 해서 홀로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고 바닷가 한구석이라고 해서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는 어디를 가더라도 존재하지 않음이 없으며, 그것을 밝혀서 행하게 하는 자 또한 어디를 가더라도 없지가 않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반드시 표시하여 존숭함으로써 사범(師範)의 소재를 밝힌 연후에야 한 시대의 나아갈 바가 정해지고 인심이 함께 지켜야 할 바가 민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날 주부자(주희)는 그래서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선성(先聖:공자)과 선사(先師)를 높여서 제사지냈고, 또 여부(廬阜)에다가 별도로 사당을 세워서 염락(濂洛)의 여러 선생들을 제향하였습니다.

 

무이(武夷), 고정(考亭), 자양(紫陽), 회암(晦庵), 건안(建安), 운곡(雲谷), 독봉(獨峰) 등 모두 20여 곳의 서원들은 모두 우리 주문공(주희)이 도를 강론하고 실제 거치신 곳입니다.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하게 하여 천하에 밝게 내걸고 후학을 가르치자 사람들이 나아갈 곳을 알게 되고 선비들이 숭상할 바를 알게 되어 인륜은 위에서 밝아지고 교화는 아래에서 행해졌으니,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하고 세상의 도리를 부지한 그 공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방은 비록 바닷가 한구석에 위치하고 있지만 우리 도의 전통은 기자(箕子)가 교리를 펴던 날에 이미 동방으로 왔으니, 문명의 정치와 예양(禮讓)의 행실이 저절로 유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원을 세워서 어진 이를 존중하는 일은 상하 천 년 사이에 아주 적막하여 그런 소문이 들리지 않다가 소대(昭代:문화가 발달하고 태평한 시절)에 처음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액(賜額)하고 서적을 반포하여 아름다움을 펴고 영광스럽게 한 예전(禮典)은 송나라 태종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 대해서 한 것이나 이종(理宗)이 고정서원(考亭書院)에 대하여 한 것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았기 때문에 사방의 인사들이 흔연히 흠모하고 제제다사(濟濟多士)가 법으로 삼아, 선정(先正)이 자취를 남기고 향기를 흩뿌린 땅마다 서원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혹은 조정에 청하기도 하고 혹은 사사로운 계획에서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아 선유가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하게 하였던 뜻이 천 년을 거치도록 한가지로 똑같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성스러운 시대의 문화를 숭상하는 교화와 즐겁게 육영하는 성대함이 중국에 비하더라도 광채가 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퇴도 이 선생(퇴계 이황)은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이 도에 가깝고 영특함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현을 흠모하였으니, 사승(師承)으로 말미암지 않고 초연히 홀로 조예처를 얻었습니다.

 

그 학문을 보면, 궁리(窮理)하여 치지(致知)하고, 스스로의 몸에 돌이켜서 실질을 밟아 나갔으며, 가까운 것을 먼저하고 멀리에까지 미치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도달하였습니다. 덕으로 나아가려는 뜻이 견고하기가 금석과 같았고, 본심을 붙잡고 자신을 성찰하는 공이 일용의 생활에서 드러났습니다. 박학(博學)과 약례(約禮)를 둘 다 지극하게 하였고, ()과 의()를 함께 지녔으며, 정성스럽고 순정하며 온후하고 순수하여 모남이 없었습니다.

양심을 확충하고 양성하기를 오랫동안 하여, 영화(英華)가 나날이 빛났습니다. 남을 가르침에는, 격치(格致성정(誠正)에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쇄소응대(灑掃應對)에서 궁리진성(窮理盡性)에 이르기까지 그 순서가 있어 각각 자질에 맞게 성취시켰습니다.

 

덕을 실행하여 자기 몸을 가짐에 있어서는 동정(動靜) 간에 떳떳함이 있었고, 안과 밖이 일치하였으며, 늘 상제(上帝)가 임한 듯이 부친과 스승이 앞에 계신 듯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의(威儀)와 용지(容止)의 준칙은 평생토록 결코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을 접할 때는 마치 봄빛이 온화하듯 하였고, 남을 감동시킬 때는 마치 제때에 맞춰 내리는 비가 촉촉이 적시듯 하였습니다. 일에 응하여서는, 비록 앞에서 그 일이 일만 번의 현상이 바뀌더라도 마치 횃불을 비추듯 자세히 살피고 저울추로 재듯 정밀하게 헤아렸습니다.

 

빈부와 귀천과 사생도 모두 그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보기를 마치 내 상처를 보듯이 하여, 그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함을 나의 몸에서 직접 느끼듯 절실히 하였습니다. 군주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비록 한가히 거처할 때라도 가슴에서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권권하게 군주의 학문을 개도(開導)하고 군주의 덕을 보양(輔養)하는 일을 정치의 큰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성학십도를 올려서 정치가 나오는 근원을 단서로 보이고, 육조(六條)를 상소하여 시절에 절실한 급무를 개진하였습니다. 그 말한 바는 모두 지성(至誠)과 측달(惻怛)에서 발현하였으며, 실행을 즐거워하고 어긋남을 우려함은 고인의 태도에 부합하였습니다. 관직을 사양하거나 받아들이며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남은 오로지 의()를 따랐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조정에서 떠나 있었더라도, 사람들은 늘 그 출처행장(出處行藏)이 우리 도의 성쇠 및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어 있다고 여겼습니다. 만년에는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수립되었으나, 그래도 의리는 무궁하고 세월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여 늘 부족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도에 관해서 이른바 자강불식(自强不息)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명도설(天命圖說)의 저술은 성리의 근원을 천명하고, 이학통록(理學通錄)은 사도의 전수를 밝혔습니다.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역학의 정미한 온축을 발명하였습니다. 주서절요(朱書節要)는 선유가 공력을 들였던 취지를 드러내었습니다. 경전(經傳)을 훈석(訓釋)할 때에는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고정(考訂)해서 속유의 왜곡된 설의 잘못을 정정하였습니다. 사설(師說)을 강론할 때에도 역시 아주 미세한 것까지 분석하여, 후학의 도로 향하는 방향을 통일하였습니다.

 

이기(理氣)의 선후를 논하고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차이를 변별해서 우뚝하기가 마치 황하 한가운데의 지주(砥柱)와 같았으며 환하기가 마치 해와 별이 하늘에 붙어 있듯이 하였습니다. 우리 동국의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마치 태산과 교악이 우람하게 서 있는 듯이 하여, 모두가 이 학문의 요체와 이 도의 정설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이 도에 대해서는 강론하여 밝히고 우익(羽翼)한 공로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있어 온 이래로 문장과 절의가 있는 인사들이 각 시대마다 끊이지 않았고, 간혹 도학으로 시대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표리(表裏)와 정조(精粗)가 한결같이 올바름에서 나와 수사(洙泗)의 적통을 빛내고 정주(程朱)의 종파(宗派)를 이은 사람은 오로지 우리 선생 한 사람뿐입니다. 하지만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산과 동량재가 홀연 무너지니, 우리 도가 통탄해하기를 극도로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안동은 영남에서도 아주 큰 고을이며 여산(廬山)은 이 한 고을에서도 가장 경승지입니다. 또한 실로 선생이 젊었을 때 독서하신 곳입니다. 동부(洞府)가 깊고 그윽하며 운학(雲壑)이 요조한데다가 강의 물 흐름이 그치지 않고 그 사이를 콸콸 흐릅니다. 선생의 의형(儀形)이 완연히 수중의 바닥에 있는 듯하니, 그 땅을 보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여 고산경앙(高山景仰)의 뜻을 두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선생의 조상은 대대로 이곳에 거처하였고, 다만 한두 세대만 예안(禮安)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여러 선영 역시 우리 고을에 있으니, 선생은 곧 우리 고장 사람입니다. 성스러운 덕이 환하게 빛나서 사람들의 이목에 들어오니,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는 정성은 말려야 말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비록 세월이 떨어진 것이 1천여 년이고, 땅이 거리를 둔 것이 1천여 리라고 하여도 역시 그 풍모를 듣고서 감동을 일으킬 만합니다. 다행이 지금 이 한 시기를 같이하고 이웃 고을에 거처할 수 있어서 외람되이 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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