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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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호계서원 |
명칭 | 『鶴峯全集』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金誠一 |
소장정보 |
◦ 『鶴峯全集』, 金誠一, 「跋文」
…先生下世。今五十七年。及門之士。零落殆盡。無能謀所以壽其傳者。廬江山長前縣監李君弘祚,前直長南君礏。深有慨于此。與前參奉柳君義男,朴君烶生員李君渫,柳君橚及先生之從孫是榲諸公合議。始役于廬江。於是道內列邑守宰及士林。咸助其費。閱月而工告訖。…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57년이 되었다. 선생의 문하에 있던 인사들이 거의 다 죽어서 선생의 글을 영원히 전하기를 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여강(廬江)의 산장(山長)인 전 현감 이홍조(李弘祚), 전 직장 남업(南礏)이 이 점에 대해 몹시 개탄하여 전 참봉 유의남(柳義男)ㆍ박정(朴烶), 생원 이설(李渫)ㆍ유숙(柳橚)과 선생의 종손(從孫) 김시온(金是榲) 등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모아 비로소 여강에서 간행하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도내 열읍(列邑)의 수령과 사림(士林)이 모두 비용을 도와서 몇 달 뒤에는 역사를 마칠 수가 있었다.…
◦ 『鶴峯全集』, 金誠一, 附錄권1
「年譜」
十五年丁亥先生五十歲
謁廬尊道祠。卽今之虎溪書院也。在府東洛江上萬曆丙子。鄕人拓白蓮寺舊基建院。以祀退溪先生。是行趙月川適來相訪。○後士林以先生及西厓先生配食是廟。
만력 15년(1587, 선조 20) 정해. 선생 50세
여강(廬江)의 존도사(尊道祠)를 배알하였다. - 바로 지금의 호계서원(虎溪書院)이다. 안동부의 동쪽 낙동강 가에 있는데,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 9)에 향인(鄕人)들이 백련사(白蓮寺)의 옛터를 개척하여 서원을 세우고 퇴계 선생을 제향(祭享)하였다. 여기에 갔을 때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마침 찾아왔었다. ○ 나중에 사림(士林)이 선생과 서애 선생(西厓先生)을 이곳 사당에 배향(配享)하였다.
숙종 대왕 2년(1676) 병진.
賜額廬江書院。改爲虎溪書院。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이름을 고쳐 호계서원(虎溪書院)이라 하였다.
「年譜跋」
…先生盛德大業。磊落軒天地者。雖不待是而著。然事之始終本末。無鉅細。開卷瞭然。凡可以辨誣謗焯勤勞者。亦不能無賴於是。然則或以爲行狀已備。不必更爲此架疊者。竊恐非通論也。譜旣成。自虎溪書院。將刊布以廣其傳。終始幹其役者。柳上舍元鉉,金大雅命錫也。以栽之愚。嘗與聞次輯之意。見屬以識其後。僭率是懼。不敢猥有所稱述。敍其編次顚末如此云。柔兆敦牂夷則中旬。後學安陵李栽。謹識。
…천지간에 우뚝이 드높은 선생의 성대한 덕과 업적이 비록 이 책이 완성된 다음에야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건의 시종(始終)과 본말(本末)을 크건 작건 간에 이 연보를 펼쳐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으며, 거짓으로 헐뜯는 말에 대해 변증하거나 부지런히 수고한 사실을 밝히는 것도 이 연보에 힘입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혹자들이 말하는 ‘행장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다시 연보를 지어 겹치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은 아마도 통론(通論)이 아닌 듯하다.
연보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이를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게 되었는데, 종시토록 그 일을 주관해서 한 사람은 상사(上舍) 유원현(柳元鉉)과 대아(大雅) 김명석(金命錫)이다.
어리석기만 한 나 이재(李栽)가 일찍이 이 연보를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연보의 끝에다가 발문(跋文)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참람되고 거칠게 할까 두려워서 감히 외람스럽게 칭술(稱述)하지는 못하고, 편찬한 전말에 대해서만 위와 같이 곧바로 서술한다.
병오년(1726, 영조 2) 7월 중순에 후학(後學) 안릉(安陵) 이재(李栽)는 삼가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