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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칠봉서원지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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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칠봉서원지
명칭 屛山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李觀命
소장정보

상세정보

李觀命, 屛山集(卷之三 > 疏箚), 영·정조 연간


代原州儒生請直提學元昊配享七峰書院疏

伏以臣等。跧伏畎畒。頃聞聖上行累朝未遑之典。追上端宗大王位號。躋祔太廟。甚盛擧也。大臣繼以其時節義人可以旌表者兩臣聞。特賜旌閭。闡幽隱表風聲。俾得列於六臣之後。聽聞攸曁。遠近聳動。兩臣之事。旣在數百年外。其詳雖不可得。而元昊卽臣等同州人也。臣等得之於父老之口誦。參之以諸人之誌述。則亦可以班班考之矣。盖元昊釋褐於世宗之初載。歷敭於文宗之世。官至直提學。端宗嗣服。卽謝病歸梓鄕。逮至端宗遜位于越也。卽就越之坪曰西思乃者居焉。號其亭曰觀瀾。默寓朝宗之意。灌園鋤圃。以給其生。潛身匿跡。人莫見面。後服端宗喪三年。然後復歸于家。光廟以戶曹參議召之不起。抱西山之苦節。終沒身東崗之陂。高風餘烈。凜然如昨。此同鄕之士所以嚮風慕義憐之至今者也。今幸旌表之典。延及泉壤。泯沒之跡。煥然復明。顯隧之恩。可謂無憾矣。然而以臣等愛慕之心。亦有所歉然於中者。相與謀之曰。事固有曠百世越千里而相感者。若斯人所立之卓然。雖使楚,越聞之。而若不感激興歎則誠無人心者也。而斯人也近出吾鄕。杖屨所憇。衣冠所藏。而卓犖之節。尙今照人耳目。則其嚮往之誠。爲如何哉。然則鄕先生沒而可祭者。非斯人誰歟。州之北。有七峰書院。卽高麗進士元天錫俎䇺之所也。之節之義。前後並美。配而食之。夫誰曰不可。况我聖上嘉六臣死節之義。賜之魯湖之額。俾受中丁之享。文皇帝奬孝孺之義。復見於今日。而聖人作爲。出尋常萬萬矣。元昊與六臣同心異迹。忠節並炳。逮六臣享祀之後。配食於先賢之廟。事理卽然。灼乎無疑。此非臣等阿其所好。徼惠王朝。假寵眷於九重。以眩耀於一方者也。因此旌閭之後。更推尙賢之典。腏食舊祠。以大褒揚。則非獨一州之士。有所矜式。四方聞之。亦必有想風興起者。其在朝廷激勵風化之道。曷可少補哉。臣等玆敢不避猥越。裹足封章。仰溷宸嚴。伏願聖明察臣等慕節之誠。推聖朝表忠之典。特使異代之忠靈。乃得配食於同堂。豈獨臣等一鄕之私榮。斯乃國家之光也。


원주 유생을 대신하여 직제학 원호를 칠봉서원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상소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향리에 은거하면서 얼마 전 성상께서 여러 조정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전례(典禮)를 시행하여 ‘단종대왕(端宗大王)’이라는 위호(位號)를 추상(追上)하여 태묘(太廟)에 제부(躋祔)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매우 훌륭한 조치입니다. 대신(大臣)이 이어서 그 당시 정표(旌表)할 만한 절의 있는 두 신하를 아뢰자, 특별히 정려(旌閭)를 하사하여 감춰진 자취를 드러내고 명성을 표창하여 사육신(死六臣)의 뒤에 배열시키시니, 원근에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두 신하의 일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있었던 것인 만큼 그 상세한 실상을 알 수는 없지만 원호(元昊, ?~?)는 바로 신들과 같은 고을 사람이니, 신들이 부로(父老)들에게 구전(口傳)하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사람들이 지은 문장을 참고한다면 또한 분명히 고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호는 세종(世宗) 초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文宗) 대에 여러 관직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습니다. 단종(端宗)이 즉위했을 때 곧바로 병을 핑계 대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단종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영월(寧越)로 유배되자, 즉시 영월의 서사내평(西思乃坪)으로 가서 살면서 정자 이름을 ‘관란(觀瀾)’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묵묵히 조종(朝宗)의 뜻을 붙인 것입니다. 정원에 물대고 밭을 매면서 생계를 마련하였는데 은둔생활을 한 탓에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뒷날 단종을 위해 3년간 상복을 입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호조 참의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벼슬하지 않고 서산(西山)의 고절(苦節)을 간직한 채 끝내 동강(東崗)의 언덕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공의 높은 풍도와 남긴 업적은 어제 일처럼 늠름하니, 이것이 동향(同鄕)의 선비들이 풍도와 의리를 사모하여 지금까지도 그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다행히 정표(旌表)하는 전례가 무덤까지 미쳐서 사라졌던 그의 자취가 다시 밝게 드러났으니, 묘도(墓道)를 빛내는 성은(聖恩)에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공을 사모하는 마음속에는 또한 부족하게 여기는 점이 있어서 서로 상의하기를 “일에는 진실로 백세(百世)의 시간과 천리(千里)의 공간이 떨어져 있어도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분이 우뚝하게 수립한 것은 비록 초(楚)ㆍ월(越) 지역의 사람이 듣더라도 감격하고 흥기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 그런데 이분은 우리 향리와 가까운 곳 출신으로, 이곳에서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면서 지냈고 이곳에 의관(衣冠)이 묻혔으며 뛰어난 절의는 아직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으니, 사모하는 정성이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돌아가신 고을 출신 선생 중에 제사를 지낼 만한 인물로 이분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고을의 북쪽에 있는 칠봉서원(七峰書院)은 고려(高麗)의 진사(進士)였던 원천석(元天錫)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절개로 보나 의리로 보나 앞뒤 두 분이 모두 아름다우니, 같이 배향한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절의를 위해 죽은 사육신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노호(魯湖)’라고 쓴 편액을 하사하여 중정(中丁)의 향사를 받게 하셨다. 이는 문황제(文皇帝)가 방효유(方孝孺, 1357~1402)를 표창한 의리를 오늘날 다시금 드러낸 것으로, 성상께서 하신 일은 매우 각별한 것이다. 원호는 사육신과 한마음으로 자취만 다를 뿐, 충절이 그들과 나란히 빛나고 있으니, 사육신을 제사 지낸 뒤에 선현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들이 좋아하는 인물에 아부하고 임금의 은혜를 요구하여 궁궐에서 빌린 은총으로 한 지방에서 빛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정려한 다음, 다시 현자를 숭상하는 은전을 확대해서 옛 사당에 제사를 지내 크게 표창한다면 한 고을의 선비가 존경하고 본받을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듣고 필시 공의 풍도를 생각하면서 흥기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풍속과 교화를 힘쓰게 하는 방도에 어찌 보탬이 적겠습니까.

신들이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발을 싸매고서 소장(疏章)을 봉하여 우러러 지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해 드리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들이 절의를 사모하는 정성을 살피고 성조(聖朝)에서 충절을 드러낸 전례를 넓혀서 특별히 다른 시대의 충령(忠靈)을 같은 사당에 배향케 하신다면 어찌 신들이 사는 한 향리의 사사로운 영광일 뿐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국가의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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