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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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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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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창절서원
명칭 梅山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洪直弼
소장정보

상세정보

洪直弼, 梅山集(卷之十一 > 書), 1866

答金正宅 丁亥七夕

承喩以盛夏極熱。不脫衰絰。必添貞疾。憧憧乎慮患。苟不固吾丈深愛。孰爲我地若斯其摯乎。感極涕零。不能喩懷。巨創以來。雖不敢踰制而危身。亦不能抑情而就禮。惟衰麻在身耳。若復憂病而去之。則其異乎有三年之喪。而無一日之戚者幾希。縱令中暍而死。衰不可脫。未獲聞命。惕息惕息。元貞簡公昊出處之得中。誠若盛敎。金東峯,南秋江諸賢皆弱冠之一布衣耳。可以輕世肆志。任其自靖。如元公者。通籍蜚英。轉身爲難。而退藏於禪讓之前。明哲保身。見幾之神也。赴難於荊蠻之行。死不忘衛。服勤之誠也。服方喪三年。矢之死不出。經夷險而一節者也。其所以竭身命以徇國者。比諸金南諸賢。又加難矣。金南則與死六臣及嚴戶長幷享於越之彰節書院。而元貞簡不與焉。是爲闕典也。至若忠臣壇則嚴戶長一人外。除非死事者則俱不配食。非獨元貞簡而已。愚在越中。述觀瀾亭記。謹玆呈覽。可悉其畢義盡分之顚尾也。越中舊有生六臣祠。間因朝令毁撤。而爲端廟入越服喪。當時靖獻諸賢中。惟有元貞簡一人耳。幷享於彰節書院無可疑者。而尙寥寥。應有士論存焉耳。栗翁之獨表章梅月翁者。以立傳之出於奉敎也。元貞簡微晦其行。民無得以稱焉。故久而後顯。抑亦有時也。出處之正。不讓湛齋云者。可謂得夫子而名益彰也。


김정택에게 답함 정해년 칠석 

보내주신 편지에 한여름 극심한 더위에 상복을 벗지 않으면 반드시 고질병이 더칠 것이라고 염려하고 걱정해 마지않으셨습니다. 만일 진실로 우리 어른처럼 깊이 사랑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누가 저의 처지를 이와 같이 돈독히 위해주시겠습니까. 지극한 감격에 눈물이 흘러 가슴속에 쌓인 것을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큰 슬픔을 당한 이래로 비록 감히 정해진 제도를 넘어 몸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정(情)을 억제하여 예(禮)에 맞게 하지도 못해서 오직 상복만 몸에 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시 병을 걱정해서 이 상복을 제거한다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 하루도 슬퍼함이 없는 자와 거의 다를 것이 없으니, 비록 더위를 먹어 죽더라도 최복(衰服)을 벗을 수 없습니다. 가르치심을 따를 수가 없으니 참으로 두렵고 두렵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의 출처가 중도(中道)에 맞음은 진실로 훌륭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김동봉(金東峯)과 남추강(南秋江) 등 여러 현자들은 모두 약관(弱冠)의 한 포의(布衣)였을 뿐이니, 세상을 가벼이 여기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여 뜻한 바를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공(元公)과 같은 분은 이름이 관적(官籍)에 통하고 훌륭한 명성을 드날려서 몸을 돌리기가 매우 어려웠는데도, 선양(禪讓)하기 이전에 물러나 은둔하여 명철(明哲)하게 일을 처리하고 몸을 잘 보존하였으니, 기미(幾微)를 봄이 신묘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만(荊蠻)으로 가는 길에 난(難)에 달려가 목숨을 걸고 호위하기를 잊지 않은 것은, 군주를 위해서 부지런히 충성을 바친 정성입니다. 방상(方喪) 삼년복을 입고 죽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기로 맹세하여 험난한 시국을 두루 겪으면서도 절개를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몸과 목숨을 다하여 순국(殉國)한 것은 김동봉과 남추강 제현에 비하면 또 더 어려운 것입니다.

김동봉과 남추강은 사육신(死六臣) 및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와 함께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나 원정간공은 여기에 참여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은전(恩典)이 누락된 것입니다.

충신단(忠臣壇)으로 말하면, 호장 엄흥도 한 명 외에는 국사(國事)에 죽은 자가 아니면 모두 배향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유독 원정간공 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영월에 있을 적에 〈관란정기(觀瀾亭記)〉를 지었으므로 이에 삼가 보시도록 올리니, 의리를 다하고 분수를 다한 전말을 다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월에 예전에는 생육신 사당이 있었는데, 근간에 조정의 명령으로 인하여 훼철(毁撤)되었습니다. 단종을 위하여 영월에 들어가서 삼년상을 입은 분은, 당시 충렬을 지킨 여러 현자 중에 오직 원정간공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러니 창절서원에 함께 제향하여야 함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하나, 아직도 이런 말이 적막하게 들리지 않으니 응당 사론(士論)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율곡 어른께서 유독 매월당 어른을 표장(表章)한 것은, 전(傳)을 지으라는 교명(敎命)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원정간공은 행실을 은밀하게 하고 감춰서 백성들이 칭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이름이 드러났으니, 또한 때가 있는가 봅니다. “출처의 바름이 담재(湛齋)에게 뒤지지 않는다.”라고 한 말씀은 “부자(夫子)를 얻어서 더욱 이름이 드러났다.”고 이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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