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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정읍시
무성서원 - 武城書院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9개 서원 중 하나로 최치원(崔致遠),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灌)을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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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건립연도 1615
제향인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최치원
문화재 지정 표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사적
이칭 / 별칭
기타 서원

상세정보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9개 서원 중 하나로 최치원(崔致遠),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灌)을 제향하고 있다. 서원의 시작은 887(신라 정강왕 2) 태산현감을 지낸 최치원을 제향하기 위해 월연대(月延臺)에 생사당을 지어 모시다가 태산사(泰山祠)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 정극인이 1437(세종 19) 처가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지어 당호(堂號)를 불우헌(不憂軒)이라 하고, 가숙(家塾)을 열어 향리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가 하면 동중향음례(洞中鄕飮禮)를 시행하면서 고현동 향약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정극인 사후에 가숙은 향학당(鄕學堂)으로 발전하였으며, 그의 사후 2년 되던 1483(성종 14)에 현 위치로 태산사가 이건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정극인과 인척이었던 송세림은 1510(중종 5) 향학당을 다시 정비하여 강당과 동·서제를 지어 강학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신잠은 1543(중종 38)에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러한 유서와 강학적 전통을 토대로 현내에 5학당을 개설하여 흥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1549년 상주목사로 이임하자 태인현민들이 역시 생사당을 건립하여 기렸다. 그러다 1615(광해군 7) 향인(鄕人)들이 태산서원을 건립하고 태산사에 모셔져 있던 최치원과 신잠을 합향함으로써 사묘인 태산사와 향학당을 결합하는 특이한 서원의 발전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1630(인조 8)에 향학당을 만든 정극인과, 향학당의 운영을 맡았던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그리고 1675년에는 역시 향학당 운영을 맡았던 김관까지 추배하여 최치원을 주향으로 모두 7위를 제향하였다.

1695(숙종 21) 121일 도내 유림들은 청액소를 올리기로 합의하고. 다음해인 1696(숙종 22) 15일에 청액소를 올렸는데, 29일에 무성, 태산, 남천 중武城으로 사액이 내리는 동시에 복호(復戶) 3, 보노(保奴) 30명이 지급되고, 원생은 30명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 해 1123일에 사액사(賜額使)로 예조좌랑 유격이 파견되어 연액례를 치루었다. 당시의 연액례 사실은 무성서원 소장 고문서 중 연액기사에 자세하다. 이후 1783(정조 7)에 사우의 단청을 새로이 하였고, 1784(정조 8)에는 쌍계사(雙溪寺)로부터 최치원의 영정(影幀)을 가져와 봉안하였다. 1783년 사우중수와 최치원 영정 이안 사실은 서원에 소장된 중수일기에 자세하다.

1825(순조25) 4월 강수재(강당)의 화재가 있어 1828(순조 28) 현감 서호순(徐灝淳)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으며, 1831(순조 31)에는 최치원 영정을 다시 그렸다. 1834(순조 34)에는 무성서원에서계원필경집을 간행하여 서원에 비치하였다. 1844(헌종 10) 사우를 중수하고, 1849(철종 즉위년) 강당 재건에 힘쓴 현감 서호순의 불망비를 건립하였다. 1868(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복호보노를 삭제하였으나, 영의정 이최응의 배려로 1879(고종 16) 복호보노가 환원(1882년 불망비 건립)되고, 1884(고종 21)에는 최성재(崔成在) 등에 의하여 무성서원지(武城書院誌)가 간행되었다. 1887(고종 24)에는 강수재(講修齋)를 창설하고, 1891년에는 현가루(絃歌樓)를 건립하였다.

무성서원은 한말 병오의병(丙午義兵)으로도 유명하다. 1906년 병오창의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의 창의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0664일 무성서원에 모여 강회를 열고 최치원의 영정을 봉심하고 당시 서원소임 김기술, 유종규와 함께 강회에 참석하여 창의토적소를 올렸다. 강회가 끝난 후 80여 명의 의사가 함께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격문을 돌려 태인, 정읍, 순창, 곡성을 점령하였으나 612일 순창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임병찬 등 13명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1925년 최치원 영정을 개모, 1926년 문루의 기둥과 담장 고사 수리, 1934년 사우 중수를 거쳐 1968년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2019년 한국의 9개 서원[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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