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宋穉圭, 剛齋集(卷之六 > 跋), 1865
활계집발〔活溪集跋〕
活溪先生李公大詩文摠若干篇。附以公狀碣挽誄諸文字及寧川書院上樑文及宣額時賜祭文。爲一冊者。刊印已有年所。而華菴李公爲之序矣。公後孫集馨。復得公之文散逸者數篇而添入。兼付公胤子東林公以恂詩幾首於卷末。將重刊之。來謂余曰。願得一言以重之。余之荒拙。顧非其人。况舊序稱之以鳳凰一毛。並論其世。溯淵源於靜菴而贊歎之。余又何以贅焉。但讀其狀而詳其徽蹟。則殊不勝固陋之幸。仍知其嘉言宜多可傳。而今寂寥如是。則又不覺慨惜之深。後之閱是卷者。亦必有同余懷者矣。若東林詩什聲病華實。非余所敢知。而其擩染於家庭。而深得乎性情之正者。其將舍是而他求哉。李君之合編。甚得其宜。而誠勤之意。可謂無忝。尤可嘉也。
활계(活溪) 선생 이대병(李大甹) 공의 시문 모두 약간 편에 공의 장(狀), 갈(碣), 만(挽), 뢰(誄) 등 여러 글 및 영천서원(寧川書院) 상량문(上樑文) 및 선액(宣額)할 때의 사제문(賜祭文 임금이 내린 제문)을 부록으로 넣어 한 책〔一冊〕으로 만든 것은 간인(刊印 숙종 43년(1717)에 간인하였다)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고 이화암(李華菴) 공이 서(序)를 썼다. 공의 후손 집형(集馨)이 공의 산일(散逸)되어 있던 글 몇 편을 얻어 다시 보태고 아울러 공의 아들 동림공(東林公) 이순(以恂)의 시 몇 수를 권말에 붙여 중간(重刊 1822년(순조22)에 중간하였다)하고자 하여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한 마디 말을 얻어 무게를 더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견식이 얕고 좁으니 알맞은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옛 서문에는 ‘봉황의 깃털 하나’라는 말로 칭찬하고 아울러 그 시대를 논하여 연원(淵源)을 정암(靜菴)에까지 소급시키고 찬탄하기도 했는데, 내가 또 어떻게 사족을 달겠는가. 다만 그 행장을 읽고 아름다운 자취를 자세히 알고 나서는 고루한 내게 찾아온 행운을 더욱 이기기 못하겠다. 또 그의 아름다운 말은 마땅히 전할 만한 것이 많겠지만 지금은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을 알고 나니 또 나도 모르게 깊이 슬퍼지고 안타깝다. 훗날에 이 책을 열람하는 사람 또한 반드시 나의 마음과 똑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동림공의 시편의 성병(聲病)이나 화실(華實)과 같은 것은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지만 그가 가정교육에 깊이 젖어서 성정의 바름을 깊이 터득하였다는 것을 어찌 이것을 버리고 다른 데서 구할 수 있겠는가. 이군(李君)이 합편(合編)한 것은 그 마땅함을 잘 얻었고 정성스럽고 부지런한 뜻은 조상을 욕보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더욱 아름답게 여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