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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고산서당 > 현판·목판·비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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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고산서당
명칭 공덕추모비(功德追慕碑)
문화재 지정 표기
구분
형태사항 크기:
수량: 1기
재질: 화강암
위치
기타

상세정보

고산서당은 조선 명종때 경산현령 尹希廉과 元慶山鄕儒들의 협찬으로 창설되었으며 縣廳에서 서북쪽으로 3리되는 들판에 우뚝 솟은 孤山의 북쪽 자락에 세워져있다. 退溪 李先生께서 東遊길에 왕림하여 講會에 임하시고는 齋名을 孤山이라 하고 門額을 求道라고 명명하시고 친필을 남기셨다. 이후 임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향유 鄭變咸, 鄭變護, 呂應周, 陳睍 등이 선조 38년에 재건하였으며 大丘府使 愚伏 鄭經世先生과 提督 李三省이 여러 차례 참강하셨다. 이후에 寒岡鄭先生의 문하인 徐東皐 생원이 강론하고 서당 운영에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전하며 인조 22년에 향유들이 퇴계 우복 양 先生의 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건립의 공론을 하고 헌성금과 建材木을 모았다. 숙종 16년에 進士 韓弘翊과 鄭世誾 韓斗一 등이 선임되어 서원으로 승격시켜 숙종 23년에 役事를 완공하고 옛 齋名에 따라 고산서원으로 개칭하고 양 선생의 위패를 배향하였다. 그후 고산서원 유림계를 결성하여 계속 헌성금을 모아 위토를 장만하였다. 영조 52년에 원우 중수를 하고 정조 13년에 문루를 건립하였으며 求道 2자를 鄭道權이 모필한 것을 문액으로 걸고 廷安 金載久는 문기를 지었다. 고종 5년에 대원군의 훼철령에 철폐되고 몇 년 후 서원의 복구를 꾀하다 주모자들이 투옥되었다가 방면되었으며 고종 9년에 양 선생에 대한 향유들의 추모의 정으로 묘우유적 옆에 유허비를 세우고 현령 李憲昭가 謹識을 남겼다. 고종 16년에 유허비 아래쪽에 서당을 건립하고 강학계를 결성하여 위토전답을 고산서원 유림계로부터 물려받아 한말 토지조사사업 당시 보존위원을 선임하여 명의신탁등기로 보존해왔으며 서당건물은 대구광역시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중수의 혜택을 입었다. 한편 분산된 위토등기를 고산서당유림회로 통합 보존키 위하여 수년간 법원에 재판중이었는데 최근에 선임된 재복당장이 혼신의 노력으로 법적 승소를 얻고 나아가 서원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의 역대 향유선인들께서 里仁擇里에 얼마나 많은 勞心을 하셨는가를 엿볼 수 있다. 우리에게 남겨주신 흥학의 유적에서 그 음덕을 깨닫고 시대에 부응하여 서당의 유지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후진들의 책무라고 깊이 되새기면서 이에 유공자의 방명을 밝혀 추모의 정을 더욱 널리 오래오래 전하고자 빗돌에 새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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