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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흥암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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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769외 2필
건립연도 170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송준길
기타 서원

관찬사료

承政院日記, 英祖 2, 丙午(1726), 23

경상도 유생 진사 정상열(鄭尙說) 1400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예로부터 성현이 흥성하는 것은 모두 천지 문명의 운수에 상응해서인데, 천지 문명의 운수는 서북에서 시작하여 동남에서 끝나기 때문에 상고의 성현이 모두 서북에서 일어났으며, 태백(泰伯)이 남쪽에 봉해지고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고나서 동남 문명의 운수가 열렸습니다. 이후 건덕(乾德) 5년에 오성(五星)이 규성(奎星)에 모이자 송나라의 문명이 열렸고, 가정(嘉靖) 3년에 오성이 실성(室星)에 모이자 우리 왕조의 문명이 열렸습니다. 이 때문에 송나라의 현인들이 비로소 공자와 맹자의 법을 계승하여 우리의 도가 남쪽으로 갔으며, 우리 왕조의 현인들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법을 잘 이어받아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왔습니다. 이는 신들이 억측하여 하는 말이 아니고 이수(理數)상 자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들이 이것을 가지고 반복해서 고찰해 보니, 주돈이(周敦頤)와 정자가 처음으로 공자와 맹자의 도를 천명하고 주자에 이르러 대성하였는데, 주자가 죽고 난 뒤로는 전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현인들이 도학을 밝혀 주돈이와 주자의 연원을 계승하고 후학의 문호를 열었는데, 직전(直傳)으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있었고, 재전(再傳)으로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 두 현인에 이르러 또다시 대성하였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위대한 현인을 내어 사도(斯道)를 전하려고 한 것으로, 우리 성조(聖朝)의 문명이 열릴 운이 여기에 이르러 태양이 중천에 뜬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진 두 신하를 문묘에 배향하는 예를 여태 거른 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진 이를 존숭하고 도를 중시하는 성조의 도리로 볼 때 이 어찌 크게 흠이 되는 법식이 아니겠습니까. 어진 두 신하의 도덕과 사업은 실로 신들과 같은 후학이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또 성명 앞에 열거하고자 하여도 그 도는 천지처럼 커서 묘사할 수 없고, 그 덕은 하해처럼 깊어서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공적은 하늘처럼 밝아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총명함이 성인처럼 지혜로워 천덕(天德)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전하의 총명함은 성인처럼 지혜로우시니 필시 두 현인의 도덕과 사업이 과연 어떠한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문묘 배향을 거르고 있고, 존숭하여 보답하는 예를 건의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조정과 관학(館學)의 수치이며, 또한 어리석은 신들은 성인과 같이 밝으신 전하께서조차 어진 두 신하의 도덕과 사업의 본원을 다 아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신이 단지 두 가지 일만을 끌어와 어진 두 신하의 성대한 덕과 위대한 사업이 진정 공자와 주자의 법을 획득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겠습니다.

두 현인의 타고난 자질에 대해 말씀드리면, 송준길은 송시열을 태산이나 높은 산과 같다고 인정하였고, 송시열은 송준길을 옥 항아리나 맑은 얼음과 같다고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자질이 똑같지 않은 것은, 안회(顔回)에게는 봄의 살리는 기상이 있고 맹자(孟子)에게는 가을의 죽이는 기상이 있는 차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학문의 본말, 나아가고 물러간 시말, 의리의 근원, 빛나는 공업과 같은 것은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진실로 주역(周易)에서 말한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한다.’라는 것입니다. 신들은 성리(性理)에 관한 학설에는 강령(綱領)이 있고 조목(條目)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마음에 대해 설명하고 성탕(成湯)이 성품에 대해 설명하고서부터 비로소 강령이 되는 학설이 갖추어졌고, 공자에 이르러 완비되었습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말하고서부터 조목이 되는 학설이 점점 갖추어지다가 주자에 이르러 완비되었으니, 성리에 관한 학설은 여기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또다시 주자의 말로 인해 더욱 정밀하게 탐구하고 너무 심하게 분석하였기 때문에 갈수록 학설이 번잡해지고 갈수록 도체(道體)는 하나라는 것은 손상되었습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나오고서야 여러 학파의 학설을 일소하여 이()와 기()는 선후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에 분석해서 논하는 것이 종식되고 도체는 하나라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학설은 늘 기에 동정(動靜)이 있고 이는 작용하지 않는다.’라는 데에 있었지, ‘이가 주재처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이가 또다시 후세 사람을 기다린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에 두 현인이 문성공의 뒤를 이어 일어났는데, 이와 기에 대해 말할 때 근원을 따라 말하기도 하고 유행(流行)을 따라 말하기도 하며, 이의 측면에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의 측면에서 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많은 성인들이 논한 것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은 제각기 가리키는 것이 있으며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궁리(窮理)에 힘쓰는 선비들이 비로소 문로(門路)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 두 현인이 아니었더라면 공자와 주자가 가리킨 뜻과 문성공이 논한 말이 세상에서 모호하게 될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현인이 이룩한 도학의 근원입니다.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대체 어떠한 세상이었습니까. 오랑캐의 옷을 입는 세상이 긴긴 밤처럼 지루하게 계속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현인이 효종과 조우한 덕택에 춘추(春秋)의 대의를 밝히고 유악(帷幄)의 큰 계책을 도와 한마음 한뜻으로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효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어 뜻을 둔 사업을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복이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온 세상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나라의 백성 모두가 공자께서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하였던 의리와 주자가 고통을 참고 억울함을 삼킨 가르침을 들어 알게 만들고, 황조(皇朝)의 의관을 바꾸지 않고 홀로 명()나라의 세월을 보존하여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모두가 두 현인의 힘이었습니다. , 두 현인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예의지국도 오랑캐의 풍속이 판치게 될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두 현인이 이룩한 공업의 대략입니다.

이 두 가지 일만으로도 실로 두 현인의 도덕과 사업이 과연 공자와 주자를 빛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인의 도를 지키고 잘못된 학설을 물리친 것으로 보자면 그 공이 또한 우() 임금 못지않습니다.

역적 윤휴(尹鑴)중용(中庸)의 주석을 바꾸고 나라의 예를 어지럽혔으며 윤선거(尹宣擧)가 절개를 잃고 간사한 사람과 한무리가 되었으니, 그 재앙이 홍수나 맹수보다 더 심하였는데, 두 현인이 물리쳐서 환히 터놓았습니다. 이는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고 주자가 육구연(陸九淵)을 배척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신민들로 하여금 윤리와 도덕을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되고 난신적자를 주벌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서 역적의 토벌을 청하는 의리를 들어 토벌을 청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근래의 상황을 보니 기강은 날로 무너지고 있고 의리는 날로 어두워지고 있으며, 인심은 날로 흩어지고 있고 선비의 풍습은 날로 휘어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그 이유를 아십니까? 두 현인의 도가 이미 밝혀졌더라도 두 현인의 도가 아직 행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신들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두 현인의 도가 오그라들 때도 있고 펼쳐질 때도 있었으며 한 시대의 정치가 막힐 때도 있고 트일 때도 있었는데, 이는 필연적인 이치이면서 이미 그러하였던 자취입니다. 전하께서 한가할 때 효종과 숙종의 정치를 두루 살펴보실 터인데, 그때 치화(治化)가 널리 펼쳐지고 문교(文敎)가 청명했던 것이 과연 두 현인의 도가 세상에 크게 행해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두 현인이 태어난 것은 그야말로 영실(營室)이 오성(五星)의 상서로움을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문명이 펼쳐질 운세에 부합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전하께서 최상의 정치를 만회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유학을 통한 교화를 널리 펼치고 잘 다스리는 도리를 훌륭하게 꾸미고자 하신다면, 두 현인의 도를 높이고 공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가능하겠습니까. 두 현인이 도통을 잘 계승하여 성문(聖門)에 공을 세웠으니 본디 배향하는 예식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야말로 백 대 이후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신들이 또한 증명하겠습니다.

우리 숙종대왕께서는 덕이 천지에 부합하고 밝기가 일월과 견줄 정도여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과 출척(黜陟)의 엄격함이 한결같이 천리(天理)의 공정함에서 나와 조금도 사적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이, 성혼, 김장생 세 현인과 송나라의 여섯 현인을 문묘에 배향한 일은 실로 선현을 빛낸 성대한 의식으로서 우리 도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윽고 또 화양서원(華陽書院)과 흥암서원(興巖書院)의 액호(額號)잘못된 학설을 잠재우고 선비가 나아갈 바를 바로잡았다.[息邪說正士趨]’라는 6자를 친히 써서 서원에 걸게 하셨는데, 화양서원은 송시열의 서원이고 흥암서원은 송준길의 서원입니다. 우리나라의 유현이 본디 적지 않은데도 유독 두 현인만 특별히 존숭하고 표창하며 예사롭지 않은 의식을 베푼 것은, 성인처럼 밝은 지혜를 가진 숙종께서 두 현인의 도덕과 사업이 유학자들의 업적을 집대성하여서 후학의 표준이 된다는 것을 잘 아셔서입니다. 문묘에 미처 제부(躋祔)하지 못한 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겨를이 없어 시행하지 못한 의식이었는데, 급기야 우리 선대왕께서 경기 유생들이 배향하기를 청한 데 대해 답하시면서 해당 조()에서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셨으니, 분명 성지(聖旨)로 이미 윤허하셨습니다. 그러하니 성대한 의식을 아직 거행하지 못한 것은 단지 신하들의 죄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현인을 존숭하고 도를 중시하는 마음과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이으려는 효성이 있는데, 문묘에 배향하는 예를 어찌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 기강을 떨치고 의리를 밝히고 인심을 선하게 하고 선비들의 풍습을 바르게 할 방도는 오직 두 현인의 도를 표창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의식을 속히 거행하는 데 있습니다. 신은 이제 혹시라도 공로에 보답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아서 두 현인의 도가 장차 폐기되고 두 현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문명의 운세가 장차 막힐까 봐 걱정입니다. 신들이 청하는 것은 단지 사전(祀典)이라는 한 가지 일이지만, 이제 전하께서 따르실지 어기실지에 흥망과 치란(治亂)의 조짐이 달려 있으니, 어찌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먼 시골의 몽매한 자들로 두 현인이 남긴 실마리를 대강 듣고서 천리 길을 달려와 한목소리로 상소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초야에서 나온 말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마시고 결단을 내려 성대한 의식을 속히 거행하신다면, 실로 한 시대의 문명이 밝을 조짐이 될 것이고 길이 사문(斯文)의 복이 될 것입니다. 신들은 너무나 간절하고 황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상소를 보고 현인을 존숭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그런데 즉시 윤허하지 못하는 것도 일을 중시하는 뜻에서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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