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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흥암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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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769외 2필
건립연도 170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송준길
기타 서원

관찬사료

承政院日記, 英祖 11年 乙卯(1735), 818

성균관 진사 홍봉한(洪鳳漢)김광태(金光泰)이원(李瑗)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우리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린 지 십수 년 동안 내리신 모든 명령은 한결같이 우리 숙묘(肅廟)를 본받았습니다. 힘차고 굳센 의리와 크고 밝은 덕이 모두 숙묘의 뜻을 잘 잇겠다는 뜻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우리 신민이라면 누군들 공경하고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 우리 숙묘의 큰 공덕은 어느 것인들 왕위를 계승한 임금이 본받고 스승 삼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년에 이르러 성학(聖學)이 더욱 높아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져 특별히 밝은 가르침을 드러내 후세에 보이셨으니, 참으로 옛 성인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먼 훗날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하는 의식만은 즉시 거행하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간 표창한 전지(傳旨)가 해와 별처럼 밝으니, 우리 영고(寧考 숙종)께서 더욱 장수하며 오랫동안 정무를 보셨다면, 배향하는 은전을 오래지 않아 거행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승하하시어 사문(斯文)이 길이 어두워졌으니, 사림의 울부짖음과 통한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경묘(景廟)께서 즉위하자 유생들이 숙묘 때처럼 다시 주청하였으나 비지를 내려 또다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 숙묘께서 신중히 하신 것은 선정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올려 배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보기 드문 은전을 연이어 거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경묘께서 신중히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어찌 겸양하기에 겨를이 없었던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사론(士論)이 나온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두 조정에서 거행하지 못하여 빠진 은전이 마치 기다린 것이 있는 듯하니,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드날리고 백대의 공론을 분명히 정하여 사문을 더욱 빛내고 유학의 교화를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 전하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 두 선정의 정대한 연원과 순수한 도학은 진실로 신들이 늘어놓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열성조가 선비를 배양하여 현인들이 배출되어 사문의 성대함이 옛날에도 비할 데가 드뭅니다. 다섯 현인이 차례로 연이어 일어나 사도(斯道)를 천명하였고, 선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에 이르러서는 다섯 현인이 과거를 잇고 미래를 연 공로를 계승하여 전하지 않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단서를 이었습니다. 세교(世敎)를 부지하고 선비의 방향을 바로잡은 모든 일은 옛 성인을 빛내고 후학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문성공을 스승 삼아 홀로 그 종통을 얻어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으니, 그가 사문에 세운 공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문원공에게 의발을 전수받아 정자와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 두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입니다. ,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 불세출의 위대한 현인을 나란히 내어 지금 시대를 한번 다스리고자 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서 온 천하가 오랑캐에게 유린당하던 때, 한 구역만 문치를 보존하여 만세의 삼강오륜을 영구히 부지함으로써 사람의 도리가 사라지지 않게 한 것은 누구의 공입니까. , 훌륭합니다. 송시열의 도학과 학문으로 말하자면 바로 동방의 주자입니다. 타고난 엄숙하고 굳센 자질도 비슷하고, 이른 나이에 도를 구한 것도 비슷하며, 집안의 가르침에 물들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과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며 힘써 실천하고 체득하였다는 점 또한 무엇 하나 비슷하지 않은 점이 없습니다.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히 하고, 자신에게 돌이켜 보아 실천하며, ()을 수양하여 처음과 끝을 이루고, 도를 체득하여 더욱 정밀히 하였습니다. 엄정하게 사물을 접하고 온화하게 일을 이루어 처음과 끝이 서로 통하여 하는 일마다 마땅하지 않음이 없어, 초탈하여 도와 하나가 되었고, 우뚝이 도와 함께 섰습니다. 당시에 대인과 선생이 칭찬하고 기렸으니 비록 백수(白水 유면지(劉勉之))와 연평(延平 이동(李侗))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에게 부탁한 것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스스로 보존한 것이 순수하고 충실하므로 밖으로 시행한 것이 더없이 광명하고 정대하였습니다.

, 병자년(1636, 인조14)과 정축년(1637)의 일은 곧 송()나라가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치욕과 비슷합니다. 인심이 무너지고 세도가 쇠퇴하였으니 당시를 헤아려 보면 진회(秦檜)와 증적(曾覿) 같은 무리가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해악은 거의 홍수와 맹수보다 심하였습니다. 이때 선정은 포의로 일어나 한결같이 세도를 자임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잠시도 잊지 않았고 이단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는 생사와 화복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 몸으로 천하의 강상(綱常)을 책임지고 깊은 산에 은거하여 책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며 영원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자 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는 끝까지 어두울 이치가 없고 임금와 신하는 암암리에 뜻이 맞는 묘리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빼어나고 활달한 도량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르게 되돌릴 뜻을 지니셨습니다. 선정은 잠저에서 시강하던 시절에 지우를 입어 처음 정사하여 신하를 부르던 날 은혜를 받았습니다. 융숭한 보살핌을 받고 시원하게 뜻이 맞아 대의를 몸소 맡고 앞장서서 은밀한 계책을 내었으니, 비록 송나라 효종(孝宗)이 연영전(延英殿)에서 주자를 만나고 한나라 소열제(昭烈帝)가 제갈량(諸葛亮)과의 만남을 물과 물고기의 만남에 비유한 일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 창업을 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승하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선정이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뼈에 사무치게 슬퍼하고 충신과 지사가 지금까지 눈물을 삼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심을 다시 밝히고 의리가 어둡지 않게 하여, 삼척동자도 개돼지처럼 오랑캐를 섬기는 것이 부끄럽고 복수하고 설욕하는 것이 의로운 줄 알았으니, 모두 효묘(孝廟)의 훌륭한 공렬과 선정이 곁에서 도운 효과입니다. , 이 역시 치세를 이룩할 운수를 담당하여 삼강의 윤리를 밝히기 충분하였습니다. 만약 중국에 왕자(王者)가 나온다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와서 예의와 문물을 본받을 것이니, 그 공이 또한 어찌 작겠습니까. 옛날 문중자(文中子)가 말하기를 내가 공자(孔子)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신들도 우리나라 선비는 선정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겠습니다.

, 기해년(1659, 효종10) 효종께서 승하하신 뒤 간신들이 틈을 타서 번갈아 간사한 말을 지어내었는데, 점차 을묘년(1675, 숙종1)과 병진년(1676)에 이르자 극에 달했습니다. 한탁주(韓侂胄)의 무리가 위당(僞黨)을 없애자고 청한 말과 윤휴(尹鑴), 허적(許積)이 종묘에 고하기를 청한 상소는 어찌 천년이나 지난 뒤인데도 일이 부합하고 연도도 같은지 기이합니다. 그래도 어진 이를 높이고 간사한 이를 물리치는 우리 현묘(顯廟)와 숙묘(肅廟)의 덕이 역대 어느 왕보다 뛰어났던 덕택에 예법을 논의한 말을 분명히 분변하고 참소를 미워하는 법을 속히 시행하여 덕음(德音)이 간곡하고 시비가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신들이 또 어찌 길게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스럽게도 경신년(1680) 개혁한 뒤 영중추부사로 한번 사은숙배한 의리와 자전께서 글을 내리신 은혜에서 군신의 성대한 만남과 새로운 다스림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불행히도 흉악한 무리가 번갈아 선동하고 화를 일으킬 마음을 몰래 품었다가 결국 지난 을묘년보다 심한 화를 보탰습니다. 하지만 선정의 도덕과 광채는 천하 만세에 빛날 것이니, 그렇다면 흉도들이 과감히 해친 것은 단지 선정의 몸이었고, 해치지 못한 것은 선정의 덕입니다. 해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드러냈으니, 이것이 어찌 선정의 불행이겠습니까. 단지 저들의 간사한 흉계를 드러내기에 충분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숙묘께서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표창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발길이 닿은 곳에는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도록 허락하고, 뜻과 사업이 부합한 자에게는 함께 제사 지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일만은 우선 천천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의 덕을 논하며 그의 사업을 되짚어 보신다면, 이야말로 어찌 오늘날의 위대한 현인이자 사문의 적통으로서 참으로 공자를 배향한 문묘에 올라 영원히 제사를 받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송준길로 말하자면 자질이 탁월하고 덕성이 충실하며 정련한 금처럼 순수하고 좋은 옥처럼 온화하였습니다. 도를 밝게 보고 이치를 정밀히 살펴 남을 마주하면 한바탕 봄바람이 부는 같은 반면, 일을 맡으면 천 길 철벽이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찌감치 송시열과 함께 문원공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이미 대도의 본체를 알았고, 또 강론하고 연마하는 도움에 힘입어 본원을 훤히 살피고 이단을 분명히 분변하였습니다. 시종일관 도와 함께 하여 조금도 끊어짐이 없었으니, 형통하고 비색한 시기를 만난 점, 밝은 마음을 보존한 점은 송시열과 차이가 없습니다. 물러나서는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며, 나아가서는 다스림을 돕고 도를 실천하였습니다. 융숭한 지우에 감격하고 존왕양의의 대의를 맡았으며, 시사에 강개하여 감격한 마음으로 보답하려 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좌우에서 보좌하였으니, 복수하고 설욕하는 큰 계책은 거의 십중팔구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효종께서 승하하신 뒤 함께 참소와 이간질을 당하여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것이 어찌 두 선정만의 불행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늘이 길이 다스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송준길의 향년과 조정에 선 기간은 모두 송시열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드러난 사업이 대략 같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대체를 따지자면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였고 죽어서는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행장을 지어 후세 사람은 반드시 명도의 행장에서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들도 송시열에게서 송준길을 찾으면 거의 놓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송준길이 송시열 뒤에 태어났다면 송준길 역시 송시열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니, (), (), 안회(顔回)는 처지가 바뀌어도 모두 상대방처럼 행동하였을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도덕이 있고 또 이와 같은 사업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현인이며 군자이니, 문묘에 제사 지내는 반열에 올려 배향해야 합니다. 우리 숙묘께서는 두 사람의 덕이 같다는 점을 깊이 아시고, 기리고 높이는 모든 은전을 매번 일체 표창하셨습니다.

지난 정유년(1717, 숙종43) 손수 화양서원(華陽書院)과 흥암서원(興巖書院)의 편액을 쓰고 이어 하교하기를 굳이 친히 써서 판각하는 것은 나의 존경하는 마음을 담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셨으니 훌륭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두 선정의 자질과 기상은 모두 오백 년 간격으로 왕자(王者)가 나오는 사이에 세상에 이름난 자의 자질입니다. 학문의 성과가 저렇게 탁월하고 성대한 공업이 또 이렇게 우뚝합니다. 이미 덕을 세웠고, 또 훌륭한 말을 남기고 공을 세웠습니다. 문묘에 배향하는 규례가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있다면 우리 두 선정이 아니고 누가 되겠습니까.

, 문묘에 배향하는 일이 비록 지극히 중대하지만 예로부터 배향한 자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 도덕이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면 배향하고, 변론한 말이 세도와 관계가 있으면 배향하며, 길이 전하기에 충분한 논저를 남긴 자도 뒤따라 배향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두 선정의 도덕이 이미 순수하다는 점은 췌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변론한 말은 무너져 가는 쇠퇴한 풍속을 만회하고 이미 끊어진 올바른 학문을 천명하였습니다. 논저로 말하자면 서가에 가득하고 책상에 쌓인 것이 모두 교화를 돕고 학술을 밝힌 것으로, 먼 훗날 후학으로 하여금 모두 학문하는 방도와 덕에 들어가는 문을 알게 하였으니, 두 선정의 공과 덕이 지극합니다. 초라한 사원에 배향하는 것으로 어진 이를 본받으며 높이고 보답하는 은전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 두 선정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직접 배우고 독실히 믿던 사람은 남김없이 사라졌고, 사숙하고 존경하는 기풍은 더욱 적막해졌습니다. 흐릿하고 어지러워 세상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고 선비는 나아갈 곳을 모르니, 선비의 풍조가 지난날과 크게 달라지고 세도는 점차 긴 밤처럼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비록 밝은 우리 성상께서 위에 있어 진작하는 방도와 인솔하는 가르침을 매번 윤음에 가득 드러내시지만, 끝내 더러운 습속이 크게 바뀌고 무너진 풍속이 다시 진작되는 효과를 보지 못하겠으니, 어찌 남은 풍도와 공렬이 점차 멀어지고 희미해지는데도 천명하고 일으킬 방도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현인을 높이고 표창하는 방도는 우리 숙묘께서 이미 남김없이 거행하셨으니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한 가지 일만은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들의 청을 허락하신다면 어찌 사림의 영광일 뿐이겠습니까.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전하의 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다스림의 근본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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