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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흥암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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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769외 2필
건립연도 170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송준길
기타 서원

관찬사료

承政院日記, 英祖 11年 乙卯(1735), 925

전광도(全光道)의 생원(生員) 소대진(蘇大晉)유일상(柳一相), 유학(幼學) 김려(金礪)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 어리석고 무식하지만 그럼에도 유자(儒者)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고서 성현의 책을 읽고 성현의 덕을 사모하여 금수와 똑같이 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열성(列聖)께서 유교를 존숭한 교화 덕분이고, 또한 어찌 현인들이 학술을 드러내 밝힌 공로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미 그 사람이 존경할 만하다는 것을 알고, 또 그 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높여 받들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깊이 좋아하고 지극히 사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신들이 발을 싸매고 천 리 길을 올라와 서로 이끌고 대궐문에서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성을 살피고 말을 채택하여 한 시대의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고, 사문(斯文)의 빠뜨린 은전(恩典)을 거행해 주소서.

,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은 모두 한 가문에서 태어나 함께 한 사람을 섬긴 것이 거의 하남(河南) 정씨(程氏) 두 부자(夫子)와 같고 자품과 기상이 제각각 서로 닮았으니, 진실로 사문의 정적(正嫡)이며 한 시대의 대현(大賢)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공적과 사업은 드높아 전할 만하니, 우리 임금의 고명(高明)한 성학(聖學)으로 볼 때 신들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공로를 드러내는 일이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 사림(士林)의 기대를 위로하고 선현의 도를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관학(館學)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종향(從享)을 청한 것에 대해서도 또 신중히 하려는 뜻으로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신들은 지극히 의아하고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종사(從祀)에 합당한 선정의 도학과 끝내 져버려서는 안 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십니다. 다만 종향하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다는 이유로 곧바로 따르고자 하지 않으시어 그러한 것입니다. 청컨대 신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종향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니, 만일 적임자가 있다면 날마다 문묘에 배향하는 예를 행하더라도 일의 체모를 중시하는 도리에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적임자가 없다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수백 년간은 행한 적이 없고, 남송(南宋) 중엽 이후에는 누차 종향의 예를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명철한 성상께서 즉위하여 현인을 높이고 도를 지키는 정성을 다하셨고, 덕을 높이고 유자를 숭상하는 은전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살피고 신중하여 줄곧 망설이면서 유림(儒林)을 북돋고 추향(趨向)을 이끄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시니, 그렇다면 종사하는 일은 끝내 거행하지 못하고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의 덕에 흠이 되고 많은 선비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기필코 한번 아뢰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두 선정의 도()와 덕()이 진실로 종사에 합당한지 알고자 하십니까? 송시열은 엄격하고 바르며 강직하고 굳센 성품에 독실하고 성정한 학문을 더했고, 송준길은 온화하고 순하며 밝고 순수한 바탕에 침잠하고 탐구하는 공부를 하였습니다. 엄격하면서도 너그럽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으며 성()을 보존함에 의심하지 않고 도()와 하나 되어 두 분 모두 선현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 책임을 맡았고 덕을 높여 학문을 천명한 공로가 있습니다. 벼슬길에서 물러나서 자신을 수양할 때에는 엄숙하고 공손하고 온화하였으며 조정에 나와 일을 시행할 때에는 우뚝하고 밝게 빛났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던 날에는 만고(萬古)의 중요한 강상(綱常)을 부지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송()나라 효종(孝宗)이 철장(鐵杖)으로 단련한 뜻을 따르고, 소강(少康)의 신하 미()의 어짊을 생각하시어 즉위하신 초기에 가장 먼저 두 선정을 더욱 예우하셨습니다. 자주 예를 갖추어 초빙함에 쇄락(灑落)하게 서로 마음이 맞았고, 곁에서 다스림을 도모함에 치밀하게 계책을 모의하여 주()나라를 높이는 뜻과 오랑캐를 물리치는 계책이 환하게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비록 하늘이 돕지 않아 뜻과 업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온 동쪽 땅 억만 명의 사람들이 머리털을 풀어 흩뜨리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일이 지난 뒤 지금까지도 삼척동자로 하여금 비분강개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격분하게 하는 것은 어찌 당시의 찬양에 힘입어서 한 나라의 떳떳한 도리를 밝혀 세도(世道)를 격려한 가장 큰 공효가 아니겠습니까.

, 천운(天運)이 돌아오지 않아 한 번의 치세를 이루지 못해 인심과 세도가 점차 날로 기나긴 암흑 속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숙종대왕께서 천고에 빼어난 명철한 예학(睿學)과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현인을 높이는 독실한 마음을 지닌 덕분에 선정의 큰 덕을 예우하셨고, 선정의 유적(遺蹟)을 밝히셨습니다. 말년에는 시비(是非)를 크게 정하여 붙들어 주고 억제하는 뜻을 분명히 보여주셨으니,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은 매번 말씀하실 때에 꾸준히 내비쳤고 기리고 장려하는 일은 누차 일을 할 때에 미쳤습니다. 게다가 서원의 편액(扁額)을 직접 써서 내리신 일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그렇다면 문묘에 종향하는 의식은 진실로 속히 거행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머뭇거리다가 실행하지 못한 채 숙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사림이 지금까지 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이 역시 어찌 우선은 성상께서 그 뜻을 잘 이어 주시기를 기다려서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과연 두 선정을 종향하는 예를 오늘날에 이르러 시행해야 하는 의리를 알고자 하십니까? , 지난날에는 두 선정의 유풍(遺風)과 여훈(餘訓)이 오히려 사람들의 귀와 눈에 생생하였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 독실하게 믿은 사람 역시 세상에 많았으며, 사숙(私淑)한 사람들이 지업(志業)을 밝혀서 사림이 모두 그 책을 읽고 그 덕을 사모하며 사도(斯道)를 지키고 이설(異說)을 막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혹여 궤변을 펴는 무리와 사특하고 편벽된 말이 있더라도 결국 세도에 해를 끼치지 못하였으니, 선정의 덕은 진실로 종향의 은전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문의 변괴(變怪)가 일어나고 학덕이 높은 군자가 남아 있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몽매하여 지향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사문의 전함이 점점 멀어지고 미미하여 실낱처럼 겨우겨우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 안가 다 없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만일 크게 진작하고 크게 흥기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어디에서 덕을 보겠으며, 사특한 말이 과연 어떻게 없어지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숙종(肅宗)과 경종(景宗)의 시대에는 오히려 종사하는 요청에 신중하였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종사하는 일이 진실로 문()을 부흥하고 선비를 진작하는 하나의 큰 관건이 되니, 신들이 말하지 않아도 전하께서 마땅히 두려운 마음으로 이를 생각하여 결정하고 실천하는데 겨를이 없으셔야 합니다. 옛날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가 효종(孝宗)의 시대를 만나 망하려는 사문(斯文)을 근심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성도(聖道)를 걱정하여 무신봉사(戊申封事)를 올려 오군자(五君子)의 덕을 드러내어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기를 속히 청하였으니, 그 뜻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세상은 주자 때보다도 더욱 심하니, 전하께서 어찌 속히 성대한 전례를 행하여 드러내어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지난번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비답을 읽어 보니, 전하께서는 이미 선정의 덕업을 알고 계시고 겉치레의 묵은 폐단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공자의 묘정(廟庭)에 많이 모여 선정의 유업을 드러내기를 권면하셨으니, 전하께서도 선정의 유업이 공자의 묘정에서 강론할 만하다는 것을 아시어 오늘날 선비들이 드러내 밝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 만일 선정이 공자의 문묘에 오를 수 있어서 성상께서는 늘 바라보고 의지하는 터전이 생기고 후학은 사모하는 정성이 배가 되어, 하나 된 마음을 분발하고 여러 사람들을 고무하여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고 겉치레를 제거한다면 진작하고 새롭게 하는 교화가 머지않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지 않고 유업만 강마하게 한다면 이는 존경하고 숭상하는 명분만 있고 실상은 없는 것이니, 비록 겉치레를 힘써 제거하고자 하더라도 결국에는 도리어 겉치레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유업은 공자의 묘정에서 강론할 만하면서 그 사람은 공자의 묘당에 오를 수 없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유업을 드러내는 것으로 선정을 높이는 실질이라 여기시지만 신들은 공자의 문묘에 배향하는 것으로 유업을 밝히는 실질이라 여깁니다.

, 만일 우리 전하께서 진실로 선정신의 도와 덕을 알지 못하신다면 신들은 진실로 궁벽한 시골로 물러나 유서(遺書)를 강독하면서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고 게다가 사모하시면서 일의 체모가 중대하다고만 핑계를 대시니, 신들이 어찌 그 일을 조목조목 말씀드리고 그 정성을 다하여 입을 모아 우러러 호소하면서 청을 들어 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그 일이 행할 만하다는 것을 알아서 의심 없이 행하는 것은 덕()을 잡은 것이 굳은 것이고, 그 일이 행할 만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중하여 결행하지 못하는 것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굳은 것이니, 고집과 덕은 서로 크게 다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이미 선정의 도와 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라고 말씀하셨고, 종향을 행해야 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종향을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라고만 말씀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신중하여 곧바로 결행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신들이 죽을죄를 짓습니다만 우리 전하께서 덕을 잡은 것인지,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성명(聖明)한 제왕(帝王)은 일을 하는 데에 신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실천할 때에는 강하(江河)가 터진 것처럼 성대히 행하면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밝은 명을 내려서 세상에 드문 은전을 속히 허락하신다면 지극한 성스러움과 명철함이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종향하는 일이 어찌 다만 사림의 영광이 될 뿐이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덕을 높이는 지극한 뜻과 일을 거행하는 온당함은 하나를 들어 둘을 행하는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하늘을 우러러 지극히 바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 일은 이미 성균관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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