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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흥암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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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769외 2필
건립연도 170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송준길
기타 서원

관찬사료

承政院日記, 英祖 11年 乙卯(1735), 1211

경상도의 유학(幼學) 조세부(曺世溥)채경침(蔡景沈)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모두 아래 지방 시골 오두막집에 사는 미천한 신분으로 아는 것이 없어 나라의 엄격한 은전(恩典)과 조정의 큰일에 대해 참으로 감히 논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인을 존숭하고 덕을 사모하는 정성과 정도를 지키고 부지하는 뜻은 소원하다고 거리를 두어선 안 되고 어리석다고 차별하여선 안 되니, 이것이 신들이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어 천 리 먼 길을 수고도 잊고 올라와 구중궁궐 아래서 호소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 주소서.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고 숙묘조 때부터 시작하여 경묘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몇 번이나 상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비지에 줄곧 신중히 하겠다고 하교하시고서 시일을 끌며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니 공의가 얼마나 답답했겠으며 사림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이어서 신들이 또 삼가 생각건대, 문묘는 중요한 곳이고 종사는 성대한 의식이니 중요한 곳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참으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러하기에 우리 조정의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였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종사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께서 처음에 신중하시고 끝에 반드시 들어주신 것은, 어찌 이 일의 체면이 지극히 중대하여 처음에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고 끝에 가서는 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게 참으로 아침에 청하면 저녁에 윤허하고 어제 호소하면 오늘 따라 주는 평범한 작은 일과 같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묘에 종사하는 중대한 은전에 대해 처음부터 신중해야 한다고 여기시는 것은 즉 열성조께서 전수하신 가법이요, 제현을 종사하기 합당하니 끝에 반드시 들어주어야겠다고 여기시는 것 또한 열성조께서 전수하신 가법입니다. 이는 순전히 우리 열성조께서 경중을 헤아리고 가부를 살펴서 후세에 법으로 남긴 것이니, 지금 우리 전하께서 준수해서 시행해야 하는 것도 열성조의 가법에 있지 않겠습니까.

두 선정신의 도가 순정하고 덕이 완비되고 학문이 정심한 것은 그동안 진언(進言)에 이미 남김없이 상세히 말하였습니다. 전에 관학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선정신의 도덕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라고 하교하셨으니, 신들은 머리를 모으고 엄숙하게 읽어 보고서 전하의 고명하신 학문이 천고의 제왕보다 탁월하고 도를 중요시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정성이 한(), () 시대 이상으로 특출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상께서 미처 다 살펴보지 못하셨다면 신들 또한 바라는 바가 없겠으나, 이미 아신 이상 어찌 조종조의 가법을 따라 결연히 시행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신들의 보잘것없는 견해로 두 선정신의 도학을 보는 것은 벼룩이 바다를 재 보려는 것보다 훨씬 심하니, 어찌 만에 하나라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상과 규모가 정대하고 유풍과 여파가 밝게 빛나는 측면은 푸른 하늘에 빛나는 해와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 청명함을 아니, 청컨대 한번 주제넘음을 잊고서 전하께 대략 아뢰겠습니다.

아아, 송시열은 천지의 강대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 영준하고 뛰어난 자질을 뽐내 일찍부터 김장생의 문하에서 도를 듣고 이이와 성혼의 가르침을 사숙하여 가까이는 오현이 전승한 도통의 실마리를 받들고 멀리는 정주(程朱)의 끊어지지 않은 정학(正學)을 접하였으니, 문로는 확실하고 출처는 정대하였습니다. 널리 학문을 배우고 예로 단속하여 행실과 식견이 모두 도저(到底)한 실질이 있고 옳음을 바르게 지키고 도를 밝혀서 공명과 이익을 따지는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천 길 높이 우뚝 선 벼랑 같고 황하의 물결을 감당하는 지주산(砥柱山) 같은 실로 한 시대에 뛰어난 대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송준길은 송시열과 동시대에 태어나 스승이 같고 뜻을 함께했으니, 자질은 정련한 금과 윤택한 옥과 같았고 기상은 양기가 퍼지는 봄처럼 온화했습니다. ()()를 아울러 지니고 명()()이 모두 지극하여 그 덕을 본 자는 심취하고 풍도를 들은 자는 진심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송시열과 절차탁마하여 지기(志氣)가 서로 맞았고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바른 도리를 함께 얻음에 이르러선 두 선정이 일문에 나란히 칭송되어 아름답게 백대의 종사(宗師)가 되셨으니, 실로 하남의 두 정 선생(程先生 정호(程顥), 정이(程頤))과 같으셨습니다.

아아, 훌륭합니다. 고상한 뜻으로 산림에 있을 땐 도를 품고 홀로 선을 행하면서 생을 마치려는 듯하였다가 효묘께서 현사로 여러 번 부르시는 지우를 받자 임금의 예우에 감격하여 불현듯 조정에 나아가 요순의 도를 아뢰어 뜻이 태평성대를 기약하였고 천명을 크고 정밀히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몸소 대의를 맡았으니, 용호(龍虎)가 풍운(風雲)을 만나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감격과 군신 사이의 격의 없이 깨끗한 교유가 이윤과 탕 임금의 사이와 소열제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이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내리지 않아 효묘께서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이것이 충신 지사들이 지금까지 눈물을 삼키는 까닭입니다.

옛날 맹자께서는 전국 시대에 왕도를 밝히고 삿된 학설을 막았고 주자께서는 송이 남쪽으로 도하한 후 정학을 강론하고 대의를 밝혔으니, 그 도를 당시에 시험해 보지는 못했더라도 그 공을 논해 보면 한 번 잘 다스려진 시운에 해당할 뿐만이 아닙니다. 아아, 두 선정신은 맹자와 주자가 남긴 단서를 이었으니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지난 후에 그 광명정대한 뜻과 사업이 한 번 잘 다스려진 시운을 만나기 충분하였습니다. 현재 정학이 밝지 않고 사림이 추구할 방향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관과 신발을 거꾸로 신는 경우가 이미 오래되어 춘추대의가 어두워질 것이니, 두 선정신을 문묘에 배향한다면 어찌 더욱더 천하 후세에 크게 빛나지 않겠습니까.

두 선정신은 천고에 드물 정도로 성대한 예우를 만났고 성조에선 당시에 비할 바 없이 융숭하게 믿고 의지하였으므로 질투하고 시새워 이기려는 무리들도 따라서 나왔습니다. 음양과 선악은 대립하므로 군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인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성현이 이런 근심을 만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대성이신 공자도 업신여긴 이가 있었고 아성이신 맹자도 해치려는 이가 있었으며,현인 정자와 주자도 간당(奸黨)의 명부와 위학(僞學)하는 무리의 명단에 들었습니다. 사문(斯文)의 변괴가 옛날에도 이러했으니, 우리 선정신의 도덕과 사업으로도 또한 어찌 이론(異論)하는 자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숙종대왕께서 이를 두려워하셨으니, 경묘께서 대리청정하여 정사를 인수인계하실 때 다른 것은 언급할 겨를이 없었지만 오직 사문의 일을 거론하면서 부탁하셨고 또 소서(小序)를 지어 천하 후세에 성상의 뜻을 밝게 보이셨으며 마침내 해가 지나도록 병을 앓는 가운데에도 친히 화양서원(華陽書院), 흥암서원(興巖書院)의 편액을 쓰시고 어필을 높이 걸게 하셨습니다. 당시 성상께서 굳이 직접 써서 판자에 새겨 내리는 것은 존경하는 마음을 담기 위해서이다.’라고 하교하셨고 또 임금이 지성으로 현인을 존숭한다면 또한 선비가 추구할 바를 정하고 삿된 학설을 종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아아, 우리 성고(聖考 숙종)께서 현인을 존경하고 삿됨을 배척하는 뜻이 간절하다고 할 수 있고 드러내어 후세에 전하는 가르침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화양서원과 흥암서원은 충청도 괴산(槐山)과 경상도 상주(尙州)에 있는데 이 두 곳은 평소 선비가 많다고 알려졌으니, 숙묘께서 굳이 이런 성대한 하교를 반사하신 것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했겠습니까. 임금의 말씀이 한번 퍼지자 사방에서 귀를 세워 들었으니, 마치 일월성신이 빛나자 혜성이 저절로 소멸되는 것처럼 밝고 종률(鍾律)이 높이 걸리자 음란한 소리가 영원히 종식되는 것처럼 엄숙하였습니다. 두 선정신이 이미 생전에 임금께 지극히 성대한 예우를 입었고 죽은 후에도 받은 예우가 제향을 빛낼 뿐만이 아니니, 나라에 격앙되고 흥기된 선비들이 장차 성상의 교화가 묵묵히 운행하는 가운데 기뻐하며 춤을 출 것입니다.

숙묘께서 이처럼 두 현인을 존경하고 현사(賢邪)를 변별하시어, 지성으로 흠모하는 뜻이 윤음에 성대하게 드러났으니,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봐도 의혹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백대 후에 풍도를 들은 사람이라도 또한 놀라서 감발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열성조의 뜻을 잘 이어받는 효로써 나라를 크게 계승한 공렬이 있으시니, 정령과 조치에도 선왕의 경우를 살피고 옛 법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사문의 중대한 일에 어찌 존숭했던 바를 존경하여 표창하는 은전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에 유현을 모시는 사원(祠院)은 한두 곳이 아니라 많지만 유독 화양서원과 흥암서원에 특별한 은혜가 내려진 것은 성고의 의도가 있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으니, 신들이 어찌 선조(先朝)의 훌륭한 뜻을 살피지 않고 청을 아뢰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이어서 또 삼가 생각건대, 문묘에 종사할 사람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으니 만약 마땅한 이가 없다면 천백 세토록 비우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지만 마땅한 이가 있다면 현인들이 일시에 거론되더라도 많음이 문제 되지 않으니, 더욱 사문의 성대한 일이고 성조의 아름다운 은전이 됩니다. 한번 중국의 경우를 논해 보자면, ()나라나 당()나라의 인물들이 훌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문묘에 뒤미처 올라간 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송나라에 이른 뒤에야 주염계(周濂溪 주돈이(周敦頤)), 정명도(程明道 정호(程顥)), 정이천(程伊川 정이(程頤)),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 소 강절(邵康節 소옹(邵雍)) 북송오자(北宋五子) 및 주고정(朱考亭 주희(朱熹)), 장남헌(張南軒 장식(張栻)), 여동래(呂東萊 여조겸(呂祖謙)) 동남삼현(東南三賢)이 동시에 문묘에 올라 배향되었습니다. 당시 성대한 문치(文治)는 거의 후세가 미칠 수 없는 경지여서 지금까지 칭송이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송나라의 황제들이 사전(祀典)을 여러 번 거행하는 것이 귀찮아서 거행하지 않았다면 어찌 사문에 천고토록 흠이 되는 일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아, 우리 동방은 예의의 나라이나 위로는 단군부터 아래로는 고려까지 무릇 누천년 동안 겨우 한두 사람 일컬을 뿐이고 나머지는 고요하여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는 2, 3백 년 동안 열성조께서 기르시어 여러 현인이 나왔으니, 송대 현인들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문묘에 올려 배향하는 은전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다면 이 두 선정신을 두고 누구를 올리겠습니까. 지금 두 선정신을 나란히 문묘에 올린다면 성조에서 사문을 존경하고 사기를 진작하는 방도에도 더욱더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고정, 장남헌 등 현인들이 정자, 장횡거를 이어 문묘에 올라 배향된 경우와도 아름다움이 짝할 것입니다. 신들이 그칠 줄 모르고 길고 자세하게 아뢰어 청한 것은 실로 두 선정신의 훌륭한 도학은 결코 문묘에 올라 배향하지 않아선 안 되고 또한 이를 통해 국가의 광화를 드러내어 밝혀 영원토록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어찌 우리 동방의 문치에 일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구구하게 바라 성상께 호소하는 까닭입니다. 만약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서 머뭇거리면서 결단하지 못한 채 옳으냐 그르냐, 따르느냐 어기느냐 사이에 둔다면 국론은 안정되지 않고 사림은 추구할 방향을 잃어 점차 이단의 말이 떠들썩하고 삿된 학설이 방자하게 유행하여 인심과 세도가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근래의 일로 보더라도 또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저 하찮은 신치운(申致雲)이 감히 방자하게도 바른 사람을 미워함이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헐뜯은 경우와 다름없었으니, 참으로 입에 담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상께서 끝내 처분하셨으니, 정도를 부지하고 삿됨을 물리치는 훌륭한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성대한 은전을 일찍부터 거행하여 한 나라 선비들이 나갈 길을 바로잡으셨다면 신치운 같은 이가 있더라도 어찌 군자를 해치려는 마음을 공공연히 펴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듣건대, 지난번 하교 중에 충역의 근본을 사문에 돌린다고까지 하시어 유생들이 상소에서 변별하여 아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릇 지금의 역적은 모두 예전에 정도를 배반한 무리로 처음부터 사문에 죄를 얻었던 잔당들이니, 이 어찌 사문의 말류가 되겠습니까. 대개 그 폐단은 모두 사문을 무함하는 해악에서 비롯하였으니, 오늘날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사문의 도를 높이고 사문을 무함하는 무리를 내쫓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충역의 근본을 사문에 돌리시는 것은, 삼가 우리 전하께서 사문의 본말에 끝까지 통찰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이것이 또 신들이 사문과 세도를 근심하고 걱정하여 이렇게 속에 쌓인 말을 아뢰어 속히 문묘에 배향하는 은전을 청하고서 윤허해 주시는 말씀을 바라고 있는 까닭입니다.

무릇 천하의 일은 중도를 넘으면 치우치게 될 수밖에 없으니 신중해야 할 때 신중하면 신중함이 중도를 얻고 거행해야 할 때 거행하면 거행함이 중도를 얻습니다. 신중을 기하는 방도에 어찌 일정함이 있겠습니까. 의리가 어떠한지를 볼 뿐입니다. 한결같이 신중하기만 해서 시행해야 할 은전을 베풀지 않는다면 참으로 지극히 공명정대한 도리가 아닙니다.

아아, 두 선정신은 도학이 이미 저처럼 높고 공업도 저처럼 크며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청도 이미 여러 조정을 거치면서 여러 해가 지났으니, 신중을 기하는 도리가 이미 십분 충분합니다. 사림에서 한목소리로 내는 바람이 갈수록 간절하니 공의가 동의하는 바를 끝내 어길 수 없고, 숙묘께서 성심으로 존경하심이 매우 지극하셨으니 보기 드문 은전이 실로 오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학을 높이고 대의를 밝히는 일이 여기에 달려 있으며 사림이 추구할 방향을 바르게 하고 삿된 학설을 종식하는 일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 대현인을 경모하는 마음으로 어찌 줄곧 신중하기만 하시어 많은 선비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 있으며, 줄곧 윤허하지 않으시어 공명정대한 도리를 어그러트릴 수 있으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종조의 가법을 준수하고 성고께서 남긴 뜻을 살피고서 과감하게 결단하여 현명한 성지(聖旨)를 내리시어, 유사에게 속히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도록 특별히 명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사문에 매우 다행이고 국가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미 성균관 유생들의 비지에 유시했는데, 어찌 번거롭게 청하는가. 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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