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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흥암서원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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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흥암서원
명칭 『寒水齋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權尙夏
소장정보

상세정보

卷之二十二, , 同春先生年譜序

옛날 회옹 부자(晦翁夫子)께서 일찍이 명도 선생(明道先生)을 찬()하기를 서일상운(瑞日祥雲)이요 화풍감우(和風甘雨)로다.”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이 말을 외면서 몹시 감격하여 말하기를 백세(百世) 이후로 그 누가 이 말에 방불할 수 있겠는가.” 하였었다. 그런데 삼가 생각해 보니, 우리 동춘 선생은 이 말에 거의 방불하다 하겠다. 선생은 산하(山河)의 정기(正氣)를 타고 나서 자품이 청명하고 순수하여 덕행과 기국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므로, 선생을 본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복종하고 사모하였다.

선생이 조금 자라서는 사계 선생(沙溪先生)을 사사(師事)하면서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도의계(道義契)를 맺었고, 약관(弱冠)에는 정 문장(鄭文莊 정경세(鄭經世)) 댁에 장가들었는데, 정 문장도 선생을 매우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온 세상을 진동시킴으로써 성대히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르는 인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병자정축년 이후로는 세상에 나가는 것을 사절하였고, 을유년에는 지평에 제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효종(孝宗)이 즉위하여서는 선생을 어수(魚水)의 교계(交契)로 의탁하자, 선생이 한때의 제현(諸賢)들과 함께 왕정(王庭)에 나아가 성상의 뜻을 도와서 대의(大義)를 펴기를 기했었는데, 뜻밖에 참소하는 말이 먼 데로 날아가 일이 장차 불측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구학(丘壑)에 은퇴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칠 듯이 하였다.

그러다가 정유년에 이르러 상이 마음을 더욱 격려하여 마침내 선생과 우암 선생을 예로 초치(招致)하고서 모든 국사(國事)에 대하여 두 선생의 의견을 따랐다. 그리하여 선생이 유악(帷幄)을 출입할 때는 상을 계도한 것이 매우 많았고, 예복(禮服)을 입고 조정에 있을 때는 백관들이 선생을 태산처럼 우러러서, 사람마다 군신 사이에 계합(契合)의 융숭함이 멀리 천고에 뛰어나니, 크나큰 공업 이룩하는 것을 날을 꼽아 기약할 만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조(聖祖)께서 승하하심으로써 대업(大業)이 무너져 버렸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선조(先朝 현종조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벼슬이 누차 승진되고 상의 은례(恩禮)가 점점 융숭하였는데, 하늘이 나라를 보우하지 않아서 간당(奸黨)들이 국권을 장악하자, 선생이 물러나서 글을 올려 인사의 부당함을 극력 말함으로써 상의 은총이 이 때문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금상(今上 숙종을 가리킴) 을묘년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 죄명(罪名)이 지하(地下)에까지 미쳤다. 그런데 경신년에 상이 크게 깨달아 특명으로 복관시키고,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병신년에 이르러서는 상이 손수 흥암서원(興巖書院)’이라는 네 대자(大字)를 써 주어 상주(尙州)의 사우(祠宇)에 걸도록 하였으니, 천도가 순환하기를 좋아하여 어디나 회복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상이 선생의 시종의 대략이다.

선생의 도덕과 학술에 대해서는 후생 말학(後生末學)으로서 헤아릴 바가 아니나, 우옹(尤翁)께서 일찍이 백세의 종사로서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들을 개도했다.[百世宗師 繼往開來]”고 칭하고, 또 이르기를 한 가닥 맑은 얼음이다.[一條淸氷]”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온후하고 화평한 가운데 스스로 정직하고 강대한 기운이 있다.”고 하였으니, 인욕(人慾)이 깨끗하게 없어지고 강유(剛柔)의 덕이 갖추어진 분이 아니겠는가. , 대현(大賢)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고서 그 누가 이런 경지에 참여하겠는가.

선생이 유명(遺命)으로 비갈(碑碣)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자손들이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함으로써 우암 선생이 다만 지문(誌文)을 짓고 또 유사(遺事)를 기술했을 뿐이다. 그러자 문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연보(年譜)에 사적을 기록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고 또 유명 속에도 들어 있지 않은 사항이다.” 하고서 여러 해에 걸쳐 사적들을 모아 초본(草本)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런데 농암(農巖) 김공 창협(金公昌協)이 이것을 겨우 10분의 1정도쯤 정리하고는 미처 다 마치지 못하고 작고하자, 선생의 증손인 현령(縣令) 요좌(堯佐)가 힘써 교정하여 장차 2()으로 간행하려면서, 나에게 처음부터 이 일에 참여했으므로 말 한마디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외람되이 선생의 돌보아 주심을 입어 여러 해 동안 문하에 출입을 하였으니,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고 하여 사양하겠는가. 대략 두어 줄을 권단(卷端)에 써서 스승 사모하는 생각을 부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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