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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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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옥연사
명칭 증좌찬성노공신도비명(贈左贊成盧公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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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증좌찬성노공신도비명(贈左贊成盧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풍저창수(行豊儲倉守) 노공(盧公) 신도비명(神道碑銘) : 서문을 아울러 쓰다.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이산해(李山海)가 글을 짓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吏曺參判兼同知經筵事) 김응남(金應南)이 전서를 쓰다. 현재 수상 소재선생[蘇齋先生 : 노수신(盧守愼)]이 그 조고(祖考) () 찬성공(贊成公)의 묘에 아직 비석이 없다며 몸소 행장을 지어 산해(山海)에게 주며 비명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산해가 글재주가 없으니 어찌 최대(最大) 군자(君子)의 명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하여,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다시 여러 차례 명하셨다. 마침내 사양하는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나아가 그 행장에 의거하여 서술하였으니 그 내용을 감히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노씨(盧氏)는 세계(世系)가 광주(光州)로 시조(始祖)인 서()는 고려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의정(議政) ()이 대대로 한인(漢人)이었는데 살던 군()에서 상인(尙仁)을 섬기다가 상씨(尙氏) 집안의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침내 세상을 뜨매 화령(化寧)에 장사 지냈다. 자식이 없어서 종자(從子) 참판 처화(處和)를 후사로 삼았다. 이분이 덕기(德基)를 낳았는데 통적(通籍)이다. 곧고 바른 말로 여러 차례 관직을 옮기다가 문득 외직을 청하였다. 얼마 후 동지에 제수되었으나 즐거워하지 않고 귀향하였으니 점필공(佔畢公)이 일찍이 그 사실을 묘지(墓誌)에 기록하였다. 희선(熙善)을 낳았는데 돈녕부판관을 지냈으며, 판관이 공의 부친인 경장(敬長)을 낳았다. 돈녕부판관은 일찍 세상을 떴는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공의 이름은 익()이고 자()는 공염(公琰)으로, 성화(成化) 을미년(1475, 성종 6)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외조부인 목사(牧使) 정난손(鄭蘭孫)의 집에서 길러졌다. 가정에서 유학(儒學)을 익히고 여섯 차례 예부(禮部)에 시험을 보았으나 모두 입격하지 못했다. 천거를 받아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에 보임(補任)되었으며 참군으로 전보되었다가 감찰로 승진하였다. 정덕(正德) 무인년(1518, 중종 13)에 전주통판(全州通判)이 되었다. 강직하고 청렴하고 삼가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명성이 있었다. 임기가 차서 내직으로 들어와 사의(司議)가 되었다. 얼마 후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었다. 영광은 예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으로 일컬어졌는데 열 번의 고과(考課)에서 모두 최우수 점수를 받았다. 남방의 선비들이 서로 받들었는데 문득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자 영광군이 술렁거렸으며, 떠나간 후에 더욱더 사모하였다. 다시 추밀원 도사를 거쳐 괴산군수(槐山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제(喪制)를 마치고 은계찰방(銀溪察訪)에 제수되었다가 풍저창수(豊儲倉守)로 전보되었다. 후에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지냈으며 다시 첨정(僉正)이 되었으니 외직에 있은 지 21년이었는데 부임했던 곳마다 잘 다스린 것으로 명성이 났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 224일 병으로 서울집에서 세상을 떴다. 97일 원천(遠川) 해좌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근조(近祖)의 선영이다. 사후 28년째인 계유년(1573, 선조 6)에 후손이 상국(相國)이 되어 공에게 의정부 좌찬성이 추증되었으며 참봉공에게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호방하고 개결하여 어떤 사람에게든 할 말을 다하였기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공은 상관하지 않았다. 모부인을 효도로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집안에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었다. 관직생활이 40여년이었으나 구업(舊業)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부인은 종실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온순하며 정숙하고 고요하여 가문에 시집와서는 능히 가문의 법도를 지켰다. 시어머니인 정씨(鄭氏)가 성품이 엄하여 일찍이 말이나 얼굴빛을 꾸미는 법이 없었는데 부인이 더욱 공경히 받들며 살림살이를 경영하고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 감히 자신의 뜻대로만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뜻에 맞추려 애썼으며, 물러날 때 조심스레 뒷걸음을 치며 웃어른의 하명을 기다렸으므로 정씨가 마음으로 사랑하였다. 부인의 4대조는 익안대군(益安大君)인데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아드님이다. 증조는 이름이 석근(石根)으로 익평부원군(益平府院君)이며 조부는 이름이 상()으로 백파도정(白波都正)이며 부친은 이름이 현동(賢童)으로 옥계도정(玉溪都正)이다. 모친은 이씨(李氏)인데 장간공(章簡公) 윤손(允孫)의 따님이다. 부인은 성화 갑오년(1474, 성종 5) 34일에 태어나 가정 계사년(1533, 중종 28) 정월 14일에 세상을 떴는데 그해 728일 찬성공의 묘 우측에 합장하였다. 아들 홍()은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이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처 성산이씨(星山李氏)는 대사헌 자화(慈華)의 따님이다. 2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수신(守慎)으로 갑오년 (1534, 중종 29)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계묘년(1543, 중종 38)의 전시(殿試)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현재 수상(首相)이다. 홍문관 교리 탄() 선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인 현감 대해(大海)를 후사로 삼았다. 대해는 군수(郡守) 이호약(李好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도형(道亨)이다. 차남은 극신(克愼)인데 ~3, 4자 해독 불능~ 돈녕부 첨정이며 목사(牧使) 증 참판(贈參判) 이증영(李增榮)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남이 대하(大河)인데 현령이다. 세 딸은 군수 심가수(沈嘉壽), 도사(都事) 김명현(金命賢), 참봉 김료(金璙)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는 이요빈(李堯賓)인데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61녀를 낳았는데 ~몇 글자 판독 불능~ ()과 호()는 유학(幼學)이며 흡()은 참봉이다. 딸은 유학 이저운(李著云)에게 시집갔다. , 자고로 이름난 분은 어진 사람의 소생으로, 선조가 반드시 덕이 후하고 행실이 독실하여 오래도록 배양하고 기른 후에야 그 후대에서 비로소 보답을 받은 것이니, 지금 찬성공의 덕행이 이렇듯 훌륭하고 부인의 현숙함이 또 능히 그 배필이 될 만하여, 상국을 배출하여 국가의 재상이 되게 하였다. 사림의 사표가 되는 분이 어찌 그 조상으로부터 배운 바가 없겠는가. 이로써 명()을 삼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광주 노씨는 고려의 벌족이니

대대로 아름다운 인물 배출했도다

갈수록 후하게 배출되니

이에 공이 물려받았도다

매우 풍부하니 어찌 아끼랴

상보(相補)의 자질 드러나매

시험하니 하찮지 않아라

관직생활 이십여년

거문고가 사령을 울렸어라

번거로워 칼 놓으니

소란 잠잠해지도다

가정은 미덥고

엄부는 시모에게 순종하고

기뻐하여 어김없으니

농사지으면 반드시 거두는 것과 같아

그 손자에게도 혜택이 미쳐

공경 벼슬 이르도다

구원의 좋은 돌이

우뚝하고 선기(仙機) 띠니

한 조각 비석 남겨

영원토록 우러르고저

만력(萬曆) 178월 일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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