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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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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덕암서원
명칭 「化民幼學 宋應聖 等 謹齋沐再拜 上書于 및 城主 答書」
문화재 지정 표기
작성주체 化民幼學 宋應聖 等
작성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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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문서명

시기

/수신

내 용 개 략

化民幼學 宋應聖 等 謹齋沐再拜 上書于 城主 答書

1801.8

 

제수의 제급을 바라는 화민들의 상서 / 이를 받아본 성주목사의 거절 답신.

 

化民幼學 宋應聖 等 謹齋沐再拜 上書于 城主 答

화민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재배하면서 성주 합하께 상서합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을 본받고 어진 이를 존경하는 것은 타고난 떳떳한 성품이며 도를 즐기고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정치와 교화의 선무입니다.무릇 예도에 가히 의를 흥기시킬 만한 것과 도를 가히 표창할 만한 것이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백대의 풍성을 세우고 일세의 추향에 모범이 되어 습속에 보고 느낌이 잇고 유술이 의뢰하여 흥기하도록 하여야 되오니 이는 옛 성현들이 법을 세우고 교훈을 베풀어 세상의 선속을 도와 천하만세 사람으로 하여금 군신부자의 윤리와 예악형정의 교화를 알도록 했던 것이 진실로 이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세도가 강하고 풍속이 경박하며, 성현의 도가 없어지고 성현의 말씀이 인멸되어 윤리가 두절되고 온갖 변괴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백성들이 이른바 존현낙도라는 네 글자는 진실로 오늘날 위에 있는 군자들이 세교를 부지하는 데 첫째의 급선무입니다. 따라서 저희 백성들의 말은 즉 온 고을의 공의이며, 온 고을 말은 즉 백세의 공의이니 백세의 공의를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엎드려 빌건대 성주합하께서 저희 백성들의 말을 예사로둔 유생들이 내는 진정서로 여기시와 진퇴하지 말으시면 사문의 다행인 동시 세도의 다행이겠습니다.

저희 백성들의 고을에 덕암사라는 사우가 있으니 삼익재 이선생과 백천 이선생과 학가재 이선생을 향사하는 곳입니다. 성주께서 부임하신 처음에 맨 먼저 윤리를 돈독케 하는 덕치를 행하시와 두루 선배들의 자취를 순방하실 적에 본사도 반드시 한 번 조청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되오나 저희들이 삼선생의 행의를 대략 살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익재 이선생의 휘는 천배이니 일찍이 가학인 시례의 교훈을 받아 천인 성명의 학문을 널리 통달하였으며, 한강 정선생을 사사하여 마침내 거버을 폐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관로에 추천장이 여러 번 있었으나 산림의 뜻이 더욱 견고하여 경사를 두루 관통하여 실지로 스승의 적통을 전해받았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창졸간이라도 반드시 법도를 지켜 우뚝하게 유림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거처하는 곳에 삼익이라 편액하였으니 이는 대개 익자삼우의 뜻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장여헌, 서낙재, 여감호제현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으며 더욱이 후학의 교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음에 당시 명석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옛 사람이 향선생이라 이른바 몰후에 가히 사에 향사할 만한 어진 이였습니다.

백천 이선생의 휘는 천봉이니 삼익재의 아우로 일찍이 그 백씨와 더불어 함께 한강 선생 문하에 종유하였습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과언을 스스로 옳게 여겨 몸가짐이 엄정하였습니다. 경의를 함께 지켜 성명이 같이 나아가 당세급문한 선비 가운데 짝이 드물어 주자 문하의 황면재와 정자 문하의 양구산으로 일컬었습니다. 일찍이 진사가 되어 성균관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홀로 의병을 창도하여 서울의 급난에 달려갔습니다. 계해년 인조반정으로 갱장한 처음에 특별히 정초의 명령에 응하였으나 의금부도사의 제수에 부임하지 않고 산림의 뜻을 고수하여 부사의 업을 성취하였습니다. 그 강학은 안자가 복응한 사물과 증자가 유라 한 일관이었으며, 그 문장은 옥처럼 맑고 금같이 순수하여 정대한 주공 공자의 사상이었으며 그 충의는 눈물을 지으며 의병들을 훈계 설유하여 밝은 해가 하늘 높이 뜬 듯 하였으며 가정에 있어서는 하남문호의 형제가 번갈아 화창하듯 하였으며 향당에 있어서는 호상의 끼친 서숙처럼 학도가 매우 번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저희들이 사사로이 지어낸 것이 아니옵고 장여헌이 지은 묘문과 김동명이 지은 제문에 고증하여 믿을 수 있습니다.

학가재 이선생의 휘는 주니 백천선생의 족질입니다. 그 재능과 기량은 자연적으로 이뤄졌으며 기질과 국량이 혼후하여 선고 찰방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사랑하였습니다. 나이 겨우 십 세에 여헌 장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장성하여 문장으로 세상에 울렸으나 선생이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면서 득실 영췌로 그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효제충신으로 출세의 근본을 삼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표준으로 삼았으며, 천인 성명의 원리와 음양과 도상의 오묘함과 일상생활의 인륜의 도리 등에 있어서도 그 정묘함을 다하고 은미심오함을 통찰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대개 여헌 문하에서 그 요결을 혼자만이 전해받은 뛰어난 제자였습니다. 본원을 찾아 궁구하여 염락에 접속하였으며 드러내 문장을 지음에 능히 양마와 짝이 되었습니다. 백인당을 지어 어진 은혜가 종족에 두루 미쳤으며 팔조목의 규약을 게시하여 신의가 향린에 행하였으니 진실로 이는 당시의 종사로 훌륭한 백세의 풍유였습니다. 이것이 그 대략이오며 전현들이 지은 행장과 묘갈문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 아름답도다. 삼현이 한 집에 모여졌음이여! 영남에 예로부터 대현군자가 많았다고 일컬어왔으나 그 누가 삼선생처럼 한 시대에 함께하고 한 가문에 같이한 일이 있었습니까! 온 도내 많은 선비들이 공의를 크게 발의하여 일찍이 삼선생이 노니시던 곳에 향사할 사당을 세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또한 사림의 여론이 편하지 못하고 의절의 결함이 보완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이에 감히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감히 소리를 같이하여 우러러 호소하오니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는 듯하옵니다.

대저 국학과 향사가 비록 등쇄의 구분은 있으나 관가의 예에 봉급하는 향촉과 생폐의 규모가 있었는데 본사에는 향촉의 봉송만 있었을 뿐이며 아직까지 생폐의 의전이 흠결되었으니 이것이 사림의 여론에 억울하고 개탄하는 바이옵니다. 후학으로서 선현을 존모하는 정성이 진실로 규모의 광대와 제수의 풍박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나 제물이 미비하면 예가 존중되지 못하며 예가 존중되지 못하면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며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면 도가 행해지지 못합니다. 까닭에 예에 사채라는 글을 개제하였으며, 시에 다의의 향이라 읊었으니 대개 그 의물을 갖춰서 그 예절을 다하고 그 예절을 다하여 그 도를 행한다는 것이옵니다. 이 앞에 진작 관가에 제수의 봉급을 앙청코자 하였으나 다만 일이 겨를치 못함이 있었으며 또한 시기적으로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이토록 천연되었습니다. 만약 성주께서 태만 무성의하다고 꾸짖으시면 저희 백성들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시 엎드려 비옵나니 성주께서 특별히 도를 중히 여기는 의리를 생각하시고 다시 풍속을 선화하는 방법을 통찰하시와 제수의 제급이 지금부터 시작하여 영구한 정식이 되도록 하여 주시면 사문의 다행이며 세도의 다행이겠습니다.

유도를 숭상하는 것이 어느 시대엔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만은 더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만약 처음 시작하는 것으로써 어렵게 여기신다면 천하 만사가 어찌 시작함이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상서학교의 제도도 반드시 시작한 것이 있었으며 형두읍양의 예절도 반드시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차하게 혐의스럽게 여기시면 옛 군자들이 반드시 의리를 흥기시켰는 예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만약 향사인 때문에 혐의스럽게 여기시면 역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즉 국학은 스스로 국학이며 향사는 스스로 향사입니다. 만약 국학에 대한 예로써 향사에 봉급하면 진실로 혐의가 있습니다. 등쇄가 분명하며 그에 따라 풍박이 저절로 분별되었는데 무슨 혐의스러움이 있겠습니까.

항상한 법도 가운데도 스스로 좁히고 넓힘이 있으며 정해진 과목 위에도 역시 변통함이 있습니다. 성주합하께서 다시 밝게 살피심을 더해주시면 온 고을 선비들이 대대로 전하고 전해 가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어느 때 아무 성주로부터 비로소 제수의 봉급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동향미담으로 될 것이오니 어찌 훌륭하신 덕이 빛나지 않겠습니까. 저희 백성들이 지극히 억울한 심정을 이길 수 없어 사리를 따지지 못하고 삼가 진달하오니 성주께서 처분하여 주소서.

신유(1801) 8월 일

화민유학 송응성 등 49인 근배 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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