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_META_TITLE_ 휴관일입니다.


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덕암서원 > 현판·목판·비

기본정보

좌우로 스크롤하시면 전체 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덕암서원
명칭 德巖書堂記
문화재 지정 표기
구분 현판
형태사항 크기:
수량:
재질:
위치
기타

상세정보

德巖書堂記(星州牧使 成種仁 撰)

덕암서당을 이루어 놓고 이사문 탁영과 계원이 이 서당의 연혁을 가지고 삼백여 리의 먼 길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와 기문을 부탁하였다.

그 대략을 말하되 성주 북쪽 이십리허에 옛날 덕암사라는 사당이 있어 나의 종선조 삼익재와 선조 백천, 학가재 세 선생을 향사하여 오다가 고종 5년 무진년에 반포한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다만 빈 터가 남아있었다. 불초한 우리들이 언제나 마음속에 한탄하며 정사를 세워 오래도록 추모의 정성을 다하려고 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이룩하지 못한 것이 육십 년이 가까웠다. 금년 가을 여러 종친들과 합의하여 재정을 모으고 목공을 불러 수십 일 만에 완공하였다.

그 규모를 말하면 812영으로 마루와 방, 헌함과 창문이 밝게 트여 따시고 시원한 것이 거처에 알맞아서 책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적당하니 참으로 동남쪽 지방의 학당 중에 일대 장관이라 하겠다.

완공한 뒤에 덕암서당이라는 현판을 걸었으니 서당이 세워진 곳이 덕령의 아래이며, 암포의 위인 까닭이었고, 또 옛 사당의 이름을 감히 고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바라건대 좌하께서 이러한 것을 바탕삼아 이 서당을 빛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대답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으니 삼대 대에 하던 학교제도가 없어진 이후 서원이 시작되었다. 그 서원은 학문의 강론을 먼저 한 다음에 어진 이를 숭배하였으니 창주 백록의 고사 및 우리나라 이조시대의 학교제도를 상고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그대가 어진 이를 숭배할 곳이 없는 것을 깊이 개탄하고 이 서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삼대 때의 학교제도를 이룩하였다고 하겠다. 학문을 강론함에 덕행을 근본삼지 않으면 또 어찌 어진 이를 숭배하고 덕을 본받는 도리라고 말하겠는가, 오늘날 공의 가문의 후계자로서 마땅히 덕에 들어가는 문호와 덕을 쌓는 기본을 먼저 알아 훗날 덕을 이루는 근본을 삼아야 하며, 그 역시 다른 데에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덕암사에 향사한 세 어진 이가 한강 여헌 양 선생에게 전수받은 학문과 덕행을 체득하여 힘써 실천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집에 있을 때에는 효우의 도리를 다하고 국가를 위함에는 토복의 충의를 다하며, 향리에 처함에는 예의의 풍속을 앞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하기를 삼현의 뒤에 어진 자손이 이처럼 많다고 한다면 선조의 유덕을 빛내는 것이 향사하여 숭배하는 것 못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당을 세운 그 당시 먼저 덕암이라 이름하였으니 선배들도 역시 이러한 것으로써 후인들에게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찮은 나로서 어찌 감히 중언부언 하겠는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병든 몸으로 궁벽한 곳에 칩거하여 한 번도 덕암서당에 이르러 장수하는 뜻을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그 산천의 좋은 경치와 관람하는 많은 감상을 비록 제공들을 위하여 서술하지 못하나 덕을 좋아하는 정성과 선으로 충고하는 도리는 스스로 억제하지 못할 것이 있었다. 그러한 것을 연관시켜 이 글을 써서 서로 수련하고 권면하는 우의에 스스로 부응하는 바이다. 혹시나 너 소자가 어찌 감히 덕을 안다고 하는가라고 말하지 않을는지.

무진년 동짓달에 후학 문소 김형모 삼가 씀.

 

이미지

  • 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TOP
한국서원 제향인물 동아시아서원 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