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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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삼계서원 |
명칭 | 『葛庵集』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李玄逸 |
소장정보 |
『葛庵集』, 李玄逸, 1999, 卷之二十五, 墓誌銘, 權處士墓誌銘
處士諱濡。字澤如。世爲安東人。其上世有幸者本姓金。佐高麗太祖有功。賜姓權。位爲太師。其後實蕃以大。爲永嘉右族。君之四世祖諱橃。仕本朝。官至贊成。卒。贈領議政。諡忠定公。以道德風節。爲百世師。有子二人。長曰東輔草溪郡守。季曰東美龍官縣監。是生軍資監正諱來。草溪公無子。取以爲後。軍資公前娶金氏。後娶李氏。有子三人。其季曰碩忠。則後夫人之子。資美而力學。人皆謂權氏有子矣。未仕而早卒。是於君爲皇考。母曰豐山金氏。承文正字延祖之女。君生七歲而孤。母夫人念之。自始學。能刻勵不倦。讀書爲文。不煩繩督而日就開益。長老咸稱歎。儕流莫或先也。嘗隨例應擧旣不售。遂倦遊。卽閒于家。書史自娛。每遇佳辰勝景。與其親友所過逢。酌酒賦詩以爲樂。家居孝友尤篤。謹喪祭重禮法。恤親舊盡其恩意。王母母皆早寡煢然。君每侍側。愉愉翼翼。惟恐少違志爲忤。及終。執喪追慕。有過人行。待二女兄。經營問遺勤甚。不以其夫家饒產而或輟也。從父兄若弟有先君卒而託其子者。敎誨課督。厚於己子。君少從白雲子學。白雲子者。故詩人權尙遠也。嘗以白衣。爲皇華接待使從事。於君族父而爲庶。君旣從之學。事之如嚴父。出入必告。每事咨而後行。白雲子死。其家窮不能存。君撫其孤。厚資給之而嫁其孤女。凡爲之經紀者無遺力。所居鄕。有書院曰三溪。以祀忠定公。君嘗爲洞主。增修館宇。招聚學子。勸飭奬勵。惓惓有作後進意。庚申冬。有事適南方。明年辛酉。還次府北秋山里。發疾卒。正月三十日也。春秋五十四。君之配曰禮安金氏。贈吏曹判書玏之曾孫。察訪幾善之孫。生員鋻之女。有至行醇德。在家及歸。承接上下。莫不孝順祗飭。鄕里稱其賢。先君十一年卒。享年四十六。有子男四人女二人。男長曰斗經生員。次曰斗緯。次曰斗紀,斗徽。皆好學而文。女皆嫁爲士人妻。壻曰洪游益,李梁。其餘男又四人皆幼。始君葬金氏夫人于松生洞某向之山。君卒之年二月某日。斗經等以君之喪。葬于金夫人墓後。丙寅冬。用卜人言。奉遷于才山縣西蘇用谷卯向之原。以夫人金氏祔。君修幹有儀。德器完好。樂善親仁。無忮害媢嫉之心。與人處。一接以寬與平。不爲卓詭矯激之行。而能以名節自期期人。處事持論。嶷嶷有古人風。斗經改葬旣卒事。奉家狀來。請銘文。余舊遊於君而晩節相與尤篤。義不敢辭也。則應曰諾。遂据其狀最其蹟而銘之曰。
於戲澤如。
質厚而才全。
奚命之舛。
不位以年。
有四男子。
而趾其美。
固將在是。
처사는 휘가 유(濡)이고 자는 택여(澤如)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선조에 행(幸)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본래 성은 김씨(金氏)였으나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권씨 성을 하사받고 지위는 태사(太師)에 올랐다. 그 후에 실로 번성하여 영가(永嘉)의 우족(右族)이 되었다. 군(君)의 4세조 휘 벌(橃)이 본조에 벼슬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졸(卒)한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도덕(道德)과 풍절(風節)로 백세(百世)의 스승이 되었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동보(東輔)이니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지냈고, 막내는 동미(東美)이니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막내가 군자감 정(軍資監正) 휘 래(來)를 낳았는데 초계공이 아들이 없어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군자공의 전취(前娶)는 김씨이고 후취(後娶)는 이씨인데 3남을 두었다. 막내가 석충(碩忠)인데 후부인의 아들로 자질이 아름답고 학문에 힘써 사람들이 모두 권씨 집안에 자식이 있다고 하였으나 벼슬하지 못하고 일찍 졸하였으니, 이분이 군의 황고(皇考)이다. 어머니는 풍산 김씨(豐山金氏)인데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연조(延祖)의 따님이다.
군이 태어난 지 7세에 부친을 여의자 모부인이 염려하였는데, 처음 공부할 때부터 게으르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하였고, 독서하고 글을 짓는 데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날로 진전하니, 장로(長老)들이 모두 칭찬하였고 동년배들은 아무도 앞서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관례대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나서는 마침내 벼슬할 뜻을 접고 즉시 집으로 돌아와 한가히 지내며 서사(書史)를 벗삼아 스스로 즐겼고, 매번 좋은 시절의 승경(勝景)을 만나면 왕래하는 친구들과 술 마시고 시를 읊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고, 초상과 제사를 삼가고 예법(禮法)을 중시하였으며, 친구를 구휼함에 있어 그 은혜로운 뜻을 극진히 하였다. 왕모(王母)와 모(母)가 모두 일찍 과부가 되어 외롭게 지냈는데, 군이 곁에서 모실 때에는 언제나 안색을 온화하게 하고 조심하여 조금이라도 뜻을 어겨 미워하실까 염려하였고, 돌아가시자 초상을 치르고 추모(追慕)하는 것이 남보다 훨씬 더하였다. 두 누이를 대함에 있어 일을 도모하고 문안하고 선물 보내는 것을 매우 지성스럽게 하여 그 남편의 집이 부유하다고 하여 그만둔 적이 없었다. 종부(從父)나 형 및 아우 중에 군보다 먼저 죽어서 그 자식을 맡기면 가르치고 감독하기를 자기 자식보다 후하게 하였다. 군이 젊어서 백운자(白雲子)에게 배웠는데, 백운자는 고 시인(詩人) 권상원(權尙遠)이다. 일찍이 백의(白衣)로서 황화접대사(皇華接待使)가 되어 종사하였으며, 군에게는 족부(族父)가 되는데 서손(庶孫)이다. 군이 그에게 배운 뒤로 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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