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_META_TITLE_ 휴관일입니다.


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삼계서원 > 문집

기본정보

좌우로 스크롤하시면 전체 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삼계서원
명칭 『響山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李晩燾
소장정보

상세정보

響山集, 李晩燾, 2010, 卷之五, , 答崔純夫 正愚辛丑

봄이 돌아와 매양 지난해 물가에서 이별했던 일을 생각하였는데, 지금 윤형(尹兄)이 오는 편에 보내 준 문안 편지를 받으니 위안과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를 통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공부하며 지내는 일상이 신명의 가호를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울음소리 우렁찬 사내아이를 마흔의 나이에 얻었으니 얼마나 경사스럽습니까. 그런데 보내온 편지에 승룡(乘龍)의 기쁨만을 자랑하였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

만도는 지난해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함과 병환이 이어지고 있으니, 7척의 몸을 조물주의 단련에 맡겨 둘 뿐입니다. 말세의 장구(章句)를 익히는 학문은 또한 분야가 많으나 위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구분하는 데 이르러서는 말할 때 어긋나기 쉬움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본래 공통된 문제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바를 행할 뿐입니다. 서산(西山)의 원고는 아직 다 베끼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 가지 일을 완전하게 끝내는 것은 세상에 따로 그 책임을 맡을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변변찮은 내가 어찌 운운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천휘록(闡揮錄)을 지금 수정하여 간행해서 당시 성상의 하교를 만분의 일이나마 받들려고 하는데, 도회(道會)7, 8월 사이에 있습니다. 이 일을 담당해서 마감할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우니, 우리 벗과 같은 이가 조만간에 한번 오는 것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숙중(肅仲 최정기(崔正基))은 근래의 절도가 어떻습니까? 지난번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 답하였는데 제대로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자년(1792, 정조16) 유소(儒疏)에 대한 비답에 드러내 밝히기를 생각하고 생각한다.”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실로 정조께서 친히 쓴 어필(御筆)인지라 개인의 집에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동(安東)의 교궁(校宮)에 안치하였습니다. 소장에 대한 일과 전후의 일기가 삼계서원(三溪書院)과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있었는데 학림(鶴林) 권공 방(權公訪)이 그 당시 소장을 올리는 데 참여한 유생으로서 두 서원에 보관된 문자를 절충해서 천휘록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천휘록이 이루어지자 면암(俛庵)과 와은(臥隱)을 비롯한 선배들이 서악(西岳)에 모여 교정해서 정본(正本)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작년 풍산(豐山)의 모임에서 성균관에 있는 영남의 유생이 소장을 올려 비답을 받아서 전례(典禮)를 행할 날짜를 가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좌(開座)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자년(1792) 성상의 하교는 다시 살펴야 하니, 천휘록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비로소 삼계서원에서 이전에 논정(論定)한 대로 화부(花府 안동)에 모여 성상의 하교를 살펴서 천휘록을 출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기록 이외에 을묘년(1795)과 기해년(1839, 헌종5)에 새로 첨부한 글이 또한 계획대로 하나의 문자를 자연스럽게 이룬 듯하였습니다. 상세한 내용을 알려 달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響山集, 李晩燾, 2010, 卷之五, , 晴沙先生權公文集序

주역에 이르기를 동이의 술과 궤() 둘을 질그릇으로 사용하고, 맺음을 들이되 통한 곳에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樽酒簋貳用缶 納約自牖 終无咎]” 하였는데, 정전(程傳)에서 장량(張良)이 사호(四皓)를 불러다 고조(高祖)를 만나게 하여 태자를 안정시킨 일을 여기에 해당시킨 것은 그 의미가 깊다 하겠다.

옛날 우리 명릉(明陵) 정해년(숙종33, 1707)에 청사(晴沙) 선생 권공은 정언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조금 후에 지평으로 옮겼다. 이때는 경종(景宗)이 동궁으로 계실 때였는데, 포의(布衣)의 신하 섬계(剡溪) 이잠(李潛)누군가 왕세자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라고 하며 항소(抗疏)를 올리고는 국문을 받다 죽었다.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공은 유신(儒臣)으로서 이에 대해 논구(論救)하다가 삭직을 당하였다. 그러자 권공은 일이 종묘사직에 관련되는데 내가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끝내 침묵할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포의는 전적으로 동궁을 위하여 그런 것이며, 유신은 본래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가 곧바로 칠탄과 함께 남쪽 변방으로 귀양을 간 것이 무릇 6년이었다.

대개 명릉은 지극히 자애로운 천성을 가지셨으니 애초부터 동궁을 해치려는 자가 감히 흔들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며, 여러 공들은 임금과 소원한 입장이었으니 평소 상산사호(商山四皓) 같은 명망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로 이어 억지로 간언하다가 실패하였으니, 이는 주역에서 말하는 납약자유(納約自牖)’의 뜻에 어그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 해 뜨는 곳에서 봉황이 울어 학금(鶴禁)이 다시 엄숙하게 안정되었으니, 천 리 밖 남쪽 변방으로 쫓겨나서도 오히려 우익(羽翼)의 공을 이룬 것은 상산사호가 한 고조를 앞에서 만난 일에 못지않다고 하겠다. 그래서 바야흐로 두 공이 성 밖으로 쫓겨날 때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우리가 오늘 뜻밖에도 혁혁한 행동을 다시 보는구나.” 하였던 것이다.

무릇 이 일을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혁혁한 행동에 견준 것이 진실로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러나 만약 공이 권 이상(權貳相) 선생 집안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왔겠는가. 아아! 공은 이상 선생의 집안에서 태어나 춘추(春秋)근사록(近思錄)을 스스로 마음을 전하는 비결(秘訣)로 삼았다. 또한 하당(荷塘)과 창설재(蒼雪齋) 두 분을 형님으로 섬겨 천륜(天倫)과 지기(知己)로서 덕의(德義)를 연마하고, 명행(名行)을 갈고 닦고 도예(道藝)를 힘쓴 것이 본디 이미 아름답고도 찬란하였던 것이다.

조정에 나아가 위의를 펼칠 때와 임시로 한림의 직책을 맡았을 때는 임금께서 때로 웃으며 따스한 눈길을 보내셨으며, 관동(關東)에 나가 과거 시험을 주관할 때에는 이름을 끼워 넣는 것을 막고 봉함을 열어 확인하니 많은 선비들이 공정하다고 칭송하였다. 이것으로 그의 풍모와 기국(器局), 위의와 사령(詞令)이 조정에 우뚝하였음을 대략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마디 옳은 말 때문에 그를 배척하고 공격하여 보불(黼黻)과 암랑(巖廊)의 인재를 산택(山澤) 사이에서 수척한 병자로 돌아가게 하였단 말인가. 심하구나! 당인(黨人)들의 마음 씀이여.

경종 초에 비로소 탕척하고 서용하는 은전을 입었으나, 죽기 불과 1년 전이었다. 당시 여론으로는 바야흐로 공을 전랑(銓郞)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만약 그 여론대로 전랑에 제수되어 한번 출사하였다면 쟁송으로 관복을 받는[以訟受服]’ 반열과 뒤섞이는 점이 있었을 것이니, 과거에 믿는 바가 있어 꺼리는 것이 없다.’라는 말로 중상(中傷)하던 자들이 다시 또 무슨 말을 하여 죄를 뒤집어씌웠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수정(寒水亭)에서 음풍농월하고 봄밭에 옥()을 심으며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마친 것이 어찌 도리어 하늘이 내려 준 복이 아닌 줄 알겠는가. 무릇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 말하고 침묵하는 일에 그 도()는 한 가지가 아니겠지만, 귀결점은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일 뿐이다.

공의 유문이 흩어져 수습되지 못하였던 것을 현손(玄孫) 방도(邦度) 씨가 비로소 거두어 모아서 상하 2()으로 만들었다. 그 후 50년이 지나 7대손 철연(徹淵)이 부로(父老)들의 명을 받들어 문집을 가지고 내게 와서 보이며 한마디 말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나같이 천박한 말학(末學)이 병든 채 깊은 산속에 엎드려 있으면서 어찌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엎드려 있는 이 산속이 공의 무덤과 아주 가까운지라, 살아서 이미 무자(武子)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죽어 지하에서 안연(顔淵)과 복상(卜商)이라도 만나 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이에 감히 참월(僭越)함을 무릅쓰고 수락하여 이렇게 서문을 쓰는 바이다.

대개 문집 두 책 중에서 시가 3분의 2 정도 되는데, 유배지에서 지은 것들이 대부분 대궐을 그리는 마음을 읊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전원에 묻혀 상마(桑麻) 농사를 지으면서 지은 작품일지라도 대부분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담고 있으니, 이런 마음이야말로 또한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툰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아, 나라에 훌륭한 사관이 없은 지 300년이 되었다. 근년에 나온 이른바 대동기년(大東紀年)이라는 책은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 명릉(明陵) 연간의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단지 이섬계(李剡溪 이잠(李潛)) 및 호서(湖西)의 유생 임부(林溥)의 일만 수록되어 있을 뿐 공의 상소에 대한 기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곧 재야에는 자신의 미천한 지위를 넘어선 사람이 있으나 조정에는 간쟁하는 신하가 없었던 셈이 되니 이 유집의 간행이야말로 또한 늦은 것이 아닌가.

공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에 족손인 평암공(平菴公)이 장헌세자

이미지

  • 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TOP
한국서원 제향인물 동아시아서원 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