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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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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삼계서원
명칭 『響山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李晩燾
소장정보

상세정보

卷之十三, 墓碣銘, 疎軒權公墓碣銘 幷序

산택(山澤)에서 파리한 모습으로 숨어 지내는 무리 중에는 간혹 명문고가(名門古家)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를 놓고 보자면 자신의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자신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니 참으로 극심한 불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가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만약 집안의 모든 사람이 푸른 인끈을 찬 고관(高官)이 되었을 때, 포의(布衣)로 자중(自重)하는 선비가 그 사이에 끼어 이름과 행실을 도야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점차 습속에 빠져들어 대대로 전해 온 훌륭한 풍모를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뜻을 얻건 얻지 못하건 간에 공리(功利)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동일하다 하겠다.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태사(太師 권행(權幸))를 시조로 하여 본관에 살았던 가문으로, 유산(酉山)의 충정(忠定) 선생 집안을 으뜸으로 삼는다. 충정 선생의 도덕과 풍절은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생 이후 400여 년 동안 명유(名儒)와 철사(哲士)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으니, 출사(出仕)하여 국가의 명분과 의리를 붙잡아 지킨 분들과 향리에 거처하며 유림의 종장(宗匠)이 된 분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근세의 종장으로 말하자면 이재공(頤齋公)이 바로 그분이요, 이재공은 또한 그 형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으니, 기천공(杞泉公)이 바로 그분이다. 또 두 공에게는 태중(太中)의 존귀함이 있었으니, 소헌(疎軒) 통덕랑공(通德郞公)이 바로 그분이다. 나는 소헌공을 명문고가의 유일(遺逸)이라고 생각한다.

공의 휘는 재륜(載綸), 자는 성능(聖能)이며, 충정공의 10세손이다. 증조는 정국(正國)이고, 조부는 사겸(思兼)이다. 부친 문도(文度)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모친 선성 김씨(宣城金氏)는 사간(司諫) 태일(兌一)의 손녀이자 미석(睂錫)의 따님이며,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응교(應敎) 이성(以性)의 현손이자 필()의 따님인데, 공은 창녕 성씨 소생이다. 공은 중부(仲父)인 통덕랑 백도(百度)의 후사가 되었으니, 전모(前母)는 정언 김종경(金宗敬)의 따님이며, 후모(後母)는 현감 정달신(鄭達新)의 따님이다.

공은 기질이 맑고 순수했으며 성품은 너그럽고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공령문자(功令文字)는 일찍 성취하였고, 경전의 뜻을 풀이할 때에는 많은 서적을 두루 인용하고 넓게 추론하여 완전히 이해하고야 말았다. 당시 유재(儒宰)가 안동부(安東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마친 뒤 중용(中庸)을 강론하면서 공의 변론과 답변이 해박하고 행동거지가 안정되고 신중함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과장(科場)에 들어갈 때마다 늘 즐겁고 편안한 마음을 가졌고 신진(新進)들과 강제(講題)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촌각을 다투며 글을 짓고 우열을 가려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향시(鄕試)에는 단번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에는 결국 급제하지 못하였다.

공은 식견과 의취(意趣)가 고원(高遠)하였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으로 자처하였지만 마음과 행동을 단속하는 것은 언제나 유자(儒者)의 법도를 따랐다. 중년 이후에는 스스로 느긋하게 허송세월하다가 이룩한 것이 없다.’라고 한탄하였지만, 가학을 전수하고 익히는 책무를 늘 자신이 직접 담당하였다. 남을 가르칠 때에는 언제나 배우는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교육하였고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침식을 잊기도 하였다.

일찍이 족형인 서포(西圃) 재성(載成)과 의논하기를,

소학(小學)은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한 책이며, 근사록(近思錄)은 우리 집안에서 가학으로 삼은 책이다.”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봄과 가을로 선정(先亭)에 모여서 강독하니, 문하의 선비들이 과문(科文) 이외에 이 공부가 중요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은 글을 지을 때 반드시 고문(古文) 가운데 뜻에 맞는 글을 선택하여 몇 차례 낭독한 뒤 붓을 들고 초안을 잡았으니, 문장이 평이(平易)하고 이치가 통하여 저절로 법도가 있었다. 시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좋은 벗들이 모이거나 같은 항렬의 친척들이 모일 때면 누대(樓臺)와 산수 사이에서 맑은 시편들을 번갈아 주고받곤 했는데, 구절마다 진솔한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림의 큰 논의를 담당하여 의리를 판단할 때는 공평함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을 즐기는 것은 미치지 못할 듯이 노력하고, ()을 미워하되 너무 심하게 미워하지는 말라.”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의 처세하는 방법이었다.

생모(生母)를 일찍 여읜 것을 너무나 애통해 하였으니, 생모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마다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양부모에게는 살아 계실 때 잘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때 상례(喪禮)를 잘 치러야 하는 도리에 서운함이 있으면 자식이 될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섬겼다. 생부(生父)가 거처하셨던 방에 들어갈 때면 반드시 경건한 얼굴빛을 지녔고 자리에 나아가 꼭 슬프게 흐느낀 뒤에 앉았다.

집안에서는 은의(恩義)로 가족들을 융화시켰고 친족을 대할 때는 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항상 말하기를,

윤리와 기강이 독실하지 않고도 집안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다.”

하였다.

공의 풍모와 흉금에는 시속(時俗)의 기운이 전혀 없었으며, 만년에 들수록 더욱 맑게 자신을 수양하여 깨끗한 모습을 지녔다. 백산(白山) 김공 희분(金公煕奮)이 어떤 이에게 이르기를,

그 모습을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니, ()는 어찌 참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또 정재(定齋) 유공 치명(柳公致明)은 일찍이 공을 물외(物外)의 고인(高人)’이라 하였으며, 수정(壽靜) 유공 정문(柳公鼎文)한 조각 맑은 얼음一條淸氷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니, 또한 공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공은 정조(正祖) 을사년(1785, 정조9)에 태어나서 헌종(憲宗) 갑진년(1844, 헌종10) 1124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내성현(乃城縣)의 북쪽 은봉산(隱鳳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진성 이씨(眞城李氏)는 생원이며 이조 참판에 추증된 대순(大淳)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승하(承夏)는 생원이니 바로 기천공(杞泉公)이다. 둘째는 덕하(悳夏)이다. 막내 연하(璉夏)는 도정(都正)을 지냈으니 바로 이재공(頤齋公)이며 양자로 나갔다.

승하의 아들은 복연(福淵)과 기연(祺淵)이며, 딸은 나의 아내가 되었다. 덕하는 후사가 없어 기연을 양자로 삼았다. 연하의 아들은 우연(宇淵)이고, 딸은 이명호(李命鎬), 이병룡(李炳龍), 황범현(黃範鉉), 이수송(李壽松)에게 출가하였다.

복연의 아들은 상한(相翰)이고, 딸은 장규하(張奎夏)에게 출가하였다. 기연의 아들은 상익(相翊)이다. 우연의 아들은 상기(相耆)와 상구(相耉)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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