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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산청군
신계서원 - 新溪書院

신계서원은 박익(朴翊)[1332~1398], 박조(朴調)[1350~1431], 박총(朴聰)[1352~?], 박융(朴融)[1424~?], 박소(朴紹)[1347~?]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1839년(헌종 5) 창건하고 그 해에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자 1875년 영정각(影幀閣), 세한재(歲寒齋)를 건립하고 1917년 박익(朴翊)의 위판을 복설하였다. 이후 1936년 세한재를 철거하고 재호를 신계정사(新溪精舍), 사당은 송은박선생영당(松隱朴先生影堂)이라하였다. 1985년 11월 14일 서원 소장 제기(祭器) 18점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5호로 지정, 1989년 3월 신계서원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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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문화재청 홈페이지
위치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726
건립연도 1839
제향인 박익, 박조, 박총, 박융, 박소
문화재 지정 표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이칭 / 별칭
기타 서원

상세정보

신계서원은 박익(朴翊)[1332~1398], 박조(朴調)[1350~1431], 박총(朴聰)[1352~?]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1839(헌종 5) 창건되었다. 박익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郎) 세자이사(世子貳師) 겸 중서령(中書令), 한림문학(翰林文學)을 역임하였다. 정몽주와 교유하였으며 조건 개국 후 두문동에 은거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박익의 셋째 아들 박조는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유언을 따라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넷째 아들 박총은 길재와 도의지교로 지냈다. 효행으로 호조정랑에 천거되었으며 만년에 형과 함께 낙동강 오른쪽 송지촌(松旨村)에 복거하였다. 박익의 네 아들은 모두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33(순조 33) 밀양에 박익을 제향하는 덕남서원(德南書院)이 건립되자 후손인 밀양박씨 문중과 강우지역 사림이 발의하여 단성[현 산청] 신천(新川)에 별도로 사당을 세우고 신계서원이라 하였다. 이때 박익을 주향으로 하고 박조(朴調), 박총(朴聰)을 배향하였다.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면서 훼철되었다가 1875(고종 12) 후손들이 영정각(影幀閣)과 세한재(歲寒齋)를 건립하였다. 1917년 유림의 공의로 박익의 위판을 복설하고 매년 3월 중정일에 석채례를 지냈다. 이후 1936년 건물의 노후화로 세한재를 철거하고 신계정사(新溪精舍)를 건립하였으며 19853월 신계서원의 복원이 논의되어 19893월 완공되었다. 19851114산청 신계서원 제기(山淸 新溪書院 祭器)’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5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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