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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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덕천서원 |
명칭 | 『立齋集』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鄭宗魯 |
소장정보 |
◦ 『立齋集』, 鄭宗魯, 권18, 書, 「與晉州德川書院有司」
卽伏惟淸和。僉履起居萬衛。仰慰且遡。不任區區。宗魯年迫桑楡。衰癃轉甚。世間萬事。尤不復掛念。故雖本鄕學宮。謝絶亦久矣。不意玆者。猥令無似。得廁於本院首席之列。其不鄙之盛心。固爲感激。而奈此承當之無路何哉。又况老物邈在絶遠之地。凡係院務。末由句管致力於其間。虛帶任名。尤極無謂。事當卽爲控辭。以冀遞免。而第曏伏聞河友所言。則那邊多士之論。皆以此物爲有一日之長。初欲夤緣此事。往復有便。則自今講學之道。或不無一半分有益云。此亦非空疎蔑裂者所可堪任。而尋常爲吾儕相與切磋之意。猶有不盡泯者存。果爲樂聞而竊幸焉。想於旣往其爲之講明此學。已不啻其盛。然如使自今以後。益加勉行之工。種種齊會于本院。而各盡其心。因令愚昧之人。得聞緖論之萬一。則在我管窺咫聞。雖不足與議。而以僉君子兼收博采之意言之。蒭蕘口氣。必在所擇。敢不從微見獻忠。以聽可否之命耶。爲是而姑不無黽勉之計。但念衿佩之會。自不能無所費。若院力難支。此亦終歸於擬議而已。徒爲帶任之故。而凡係院事。動輒詢於此而使之干涉。則不佞只得惶恐退縮。求以兩便於公私而已。望須曲諒而回敎之。俾有所奉而周旋幸甚。
진주 덕천서원 유사에게 주다
지금 삼가 청화절(淸和節 4월)에 여러분들의 기거가 만안하실 것으로 생각하니, 저의 마음이 우러러 위로되고 또 그쪽으로 향하니 간절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저는 나이가 만년에 접어들어 쇠퇴하기가 갈수록 심하니, 세간의 만사에 대해 더욱더 염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록 본 고장 상주의 서원 소임조차도 사절한 지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생각지도 않게, 보잘것없는 저를 외람되게 본 서원의 원장 자리에 두려 하고 있으니, 그대들이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성대한 마음은 진실로 감격스러우나 이것을 받들어 감당할 길이 없음을 어찌하겠습니까.
또 하물며 늙은 이 사람은 아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무릇 서원에 관련된 일을 그곳에 가서 관리하며 힘쓸 방법이 없으니, 이름만 헛되이 지니는 것은 더욱 지극히 의미가 없습니다. 일의 마땅한 도리는 즉시 글을 보내 체직되어 면하기를 바라야 했지만, 다만 지난번에 벗 하씨(河氏)가 하는 말을 삼가 들어보니, 그쪽의 많은 선비들이 모두 저를 나이가 조금 많은 것〔一日之長〕으로 생각하여 애초에 이 일〔원장이 되는 것〕에 인연하여 자주 오가게 하면 지금부터 강학의 도리에 혹 일 푼 내지 반 푼의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엉성하고 지리멸렬한 제가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평상적으로 우리들이 서로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하는 뜻이 아직까지도 다 없어져 버리지 않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과연 즐겁게 듣고 그윽이 다행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지난날 그곳에서 유학을 강학하여 밝힘이 이미 성대했을 뿐만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령 지금 이후로도 더욱 공부를 면려하고 실행하여 종종 본 서원에 일제히 모여 각각 그 마음을 다하고, 인하여 우매한 저로 하여금 논의한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들을 수 있게 한다면 저의 보잘것없는 식견은 비록 함께 의논할 가치도 없을 것이겠지만, 여러 군자들께서 두루 수용하고 널리 채택하는 뜻으로 말하면 꼴을 베고 나무하는 사람〔입재 자신〕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택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감히 보잘것없는 견해로 충정을 바쳐 가부의 명령을 듣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선 애써 노력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음이 없습니다. 다만 학자들이 모이게 되면 절로 경비가 들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니, 만약 서원의 힘이 지탱하기 어렵다면 이것은 또한 끝내 의논하고 마는 데 귀결될 따름입니다. 한갓 임무를 맡고 있는 일 때문에 무릇 서원에 관계되는 일을 걸핏하면 문득 저에게 물어 간섭하게 만든다면 제가 다만 황공한 마음으로 물러나 공사(公私) 간에 모두 편한 것을 강구할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곡진히 헤아려 회답해 주시어 받들어 주선할 것이 있게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立齋集』, 鄭宗魯, 권47, 行狀, 「縣令河公行狀」
公諱應圖字元龍姓河氏。晉州人。… 十六請益于南冥曹先生。先生器重之。提誨甚切。於是得聞性理之說。欣然樂之。逐年就講不輟。如山天齋,濫溪院,智谷,斷俗等寺及林葛川精舍。皆其從遊之所。曹先生又嘗以手錄士喪禮一冊授公曰。吾死以此治喪。及其疾革。又申命之。公遂遵行之。惟謹。後與門下諸公。爲尸祝先生創德川書院。院基數百畒。皆公之庄而許納焉。躳董役靡懈。以盡崇報之誠。
공의 휘는 응도, 자는 원룡, 성은 하씨, 본관은 진주이다. … 16세에 남명 조식 선생에게 배우기를 청하니, 조 선생이 뛰어난 인재를 중히 여겨 매우 절실하게 이끌고 가르쳤다. 이에 성리설을 듣게 되었는데, 이를 흔연히 즐거워하였으며, 해마다 끊이지 않고 선생을 찾아가 강론하였으니, 산천재, 남계서원, 지곡사, 단속사 및 임갈천의 정사 등은 모두 공이 선생을 쫓아 종유하던 곳이다. 조식 선생은 또 일찍이 손수 기록한 『사상례』 한 책을 공에게 건내주며, “내가 죽으면 이것으로 상을 치르라”고 하였다. 성생이 병이 위독해지자 또 거듭 이 말씀을 하였으니, 공이 마침내 『사랑례』의 내용을 오직 삼가 준행하였다. 이후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문하의 제공들과 함께 덕천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서원 부지 수백 무를 모두 공이 가진 전답으로 쓰도록 허락했다. 직접 일을 감독하며 게을리 하지 않았고, 스승의 은혜를 존숭하며 보답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 『立齋集』, 鄭宗魯, 별집 권8, 附錄, 祭文[安東屛山書院儒生柳璧祚]
晉州德川書院。咸昌臨湖書院。知禮道洞書院。大邱柳湖書院。義興龜陰書院。居昌龍川精舍。安東高山書堂。咸昌縣儒生。祭文多不盡錄。
恭惟吾嶺。學祖陶山。表裏莊敬。厓老嫡傳。衣鉢有托。實惟文莊。道莫如敬。譽不是誠。名言一題。垂裕家學。之堂之構。世世令德。先生趾美。氣淸河嶽。溫恭豈弟。冲和簡靜。天姿旣厚。門路且正。早謝科累。專意學的。持養之方。敬義先立。竆格之工。經史淹博。春噓子諒。水澄元初。蠶絲牛毛。尋討緖餘。交修博約。兩至明誠。道豈他求。夫子門墻。空山一廬。鳴鶴聞天。先朝象賢。寵卑豸冠。有孑其旌。有賁其園。泉湘土稼。嘉遯幽人。薄試絃歌。頌著冰玉。卷懷東岡。溫理舊業。寤寐巖軒。几案考亭。韶顔不老。道義睟盎。堂新修稧。有儼皋比。賢愚皆益。近悅遠來。蓍龜邦國。星斗儒林。庶幾期頤。庇我嶠南。胡遽不淑。乘化返眞。斯文靡托。學訣將湮。昏衢失燭。大廈摧梁。鄕隣胥吊。曷任痛傷。顧玆屛院。慕德偏深。誠匀束脩。韻溯瑤琴。苔階竹影。撫古傷今。禮疑誰質。學訛誰砭。龍亡虎逝。世道增悲。一瓣心香。歲星倐移。慟與愧幷。靈庶格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