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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귤림서원·오현단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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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귤림서원·오현단
명칭 『면암집(勉菴集)』, 卷 24 - 祭文 - 귤림서원 유지에서 다섯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최익현(崔益鉉)
소장정보

상세정보


숭정(崇禎) 모년 모월 모일에 후학 최익현(崔益鉉)은 삼가 충암(冲菴 김정(金淨)) 김 선생ㆍ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송 선생ㆍ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 선생ㆍ동계(桐溪 정온(鄭蘊)) 정 선생ㆍ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송 선생의 영령에 고합니다.

아, 사람이 천지에서 살아가는 원리는 정직한 것이어서,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법이라 합니다. 성인이라 해서 그것을 풍부하게 가진 것도 아니며, 어리석은 이라 해서 적게 가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형기(形氣)는 출생과 함께 갖게 되는데 그 용(用)은 성색(聲色)과 취미입니다. 인심(人心)은 강하여 나타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여 약해지므로 주고 빼앗고 반복하는 동안에 표준을 상실하고 맙니다.

선성(先聖)은 이를 민망하게 여겨서 교훈을 책에 남겼습니다. 요순(堯舜)의 유정유일(惟精惟一), 공자ㆍ안자(顔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증자(曾子)의 충서(忠恕), 맹자의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한다[遏人慾存天理]는 1천 4백 년 동안 기나긴 어두운 밤이었지만, 이 본심은 만고에 죽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는 절단된 학문을 밝히고, 정자(程子)는 오묘한 뜻을 말하고, 주자(朱子)는 정자를 계승하여 집성(集成)하였는데 일리(一理)가 두루 흘러 형통하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 낙민(洛閩 정자와 주자)의 정파(正派)가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도산(陶山 이황(李滉))과 석담(石潭 이이(李珥))이 지방은 다르지만 도는 같아서, 서질(叙秩)과 명토(命討)가 환하게 빛났는데, 그 유풍과 덕택을 바다 모퉁이의 섬까지 입게 되었습니다.

이 작은 제주도는 오랫동안 개명하지 못하여 잡스러운 말과 가죽 옷을 입는 등 풍속이 비루하였습니다. 아, 우리 오현(五賢)이 혹은 귀양살이로 혹은 관직으로 이곳에 와서 백성들이 흥기되고 감격하여 지금까지 공경하니, 그 연유를 따져 보면 사실은 하늘의 뜻입니다.

충암(冲菴)의 사업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임금과 백성을 위한 피어린 정성이요, 공자ㆍ맹자의 참된 법이었는데, 벌레 같은 무리들이 밀의(密議)하여 큰 화를 입게 되니, 지사(志士)는 기가 막혔고 백성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남은 실마리는 실상 규암(圭菴)인데, 벼 포기에 피[莠]와 같은 소인들이 이를 갈았습니다.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를 조작하여 왕가(王家)를 엿본다고 하였으며, 흠잡을 것이 없으니 좋은 꽃은 베어 내는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명(明) 나라가 망하고 왕통(王統)이 바뀌자,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은 감개하고 비통해 하였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할 때는 국서를 찢었고, 북관(北館)에 구류되어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였으니 그 누가 이와 같으리까? 문문산(文文山)이나 호담암(胡澹菴)일 것입니다.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을 말함)가 덕을 어지럽혀 감히 골육을 죽이자, 동계(桐溪)는 격분하여 맞대 놓고 그 잘못을 말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적에게 항복하자 가슴을 두드리며 ‘차라리 칼날을 밟고 죽을지언정 의리에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였습니다.

송 문정공(宋文正公 문정은 송시열의 시호)은 일세의 뛰어난 영걸로 음양(陰陽 음은 소인, 양은 군자를 말함)을 가르는데 한칼에 두 쪽을 냈습니다. 명(明)을 잊지 못하고 주자를 본받아 밝히니, 전체대용(全體大用)이 우주에 가득했습니다. 윤휴(尹鑴)가 화를 빚어 예를 멸시하고 경서를 헐뜯으며, 주자(朱子)를 무시하고 성인도 별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파를 만들고 붕당을 만들어서 국가가 거의 망하게 되니, 선생이 두려워하여 숙청하고 물리쳐서 퇴폐하는 풍조에 지주(砥柱)가 되었으니, 그 공로가 홍수(洪水)를 다스린 우(禹)보다도 월등합니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하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천하를 위하는 공적인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여러 선생께서는 상제(上帝)의 명을 따라 학문은 후학을 깨우쳐 주고 도는 선성(先聖)을 접하였습니다. 굴신(屈伸)ㆍ영욕(榮辱)이 기수의 성쇠에 관한 것이어서 한때는 운수가 비색하였지만 백대의 논의는 정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녹을 먹게 되어, 한 자 되는 소장에 진심을 털어놓되 화복(禍福)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상소문이 대궐에 오르니, 오랏줄에 묶여 문초를 받았고, 갖은 형구(刑具)가 목숨을 노리고 있었으나 바다 밖으로 귀양 가는 성은을 입었습니다. 이는 시련을 주어 저의 부족한 점을 보충한 것이니, 이는 은혜이지 꾸지람은 아니었으나, 3년 동안 담장에 갇혀서 일월을 못 보았습니다.

저 귤림(橘林)의 서원을 바라보니 제 마음이 즐겁지 못합니다. 서원 자리에 말을 방목(放牧)하고 밭을 개간하여 제사를 받들지 않으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바다에 뜬 차디찬 달과 한라산의 맑은 바람만이 그 아름다움을 변치 않고 시종일관 오래오래 전할 것입니다. 행장을 꾸려 떠나려 하니 허전한 마음이 가슴에 복받쳐 옹졸한 말과 하찮은 제수(祭需)를 가지고 삼가 제향을 올리니, 영령은 강림하여 흠향하기 바랍니다. 아, 흠향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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