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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귤림서원·오현단 > 현판·목판·비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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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귤림서원·오현단
명칭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문화재 지정 표기
구분
형태사항 수량: 1
재질: 석재
위치
기타

상세정보


橘林書院廟庭碑記

耽羅城南古有?菴廟與李平靖公約東同享而平靖公卽剌是州以淸白著名者矣 肅廟乙卯」

芝湖李公選巡撫之行以爲?菴先生道學節義一廟同?有所未安別構鄕祠于旁移奉平」

靖公是所謂永惠祠也 肅廟八年壬戌合享宋圭菴金淸陰鄭桐溪三先生立書院而 賜額曰橘林」

後十一年乙亥追享尤菴宋先生五先生學雖殊轍道則同歸盖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聖賢爲法」

而辭闢爲功夫?菴金先生諱?字元?諡文簡當 中廟有意於堯舜之治與靜菴趙先生協心?襄」

期復三代聖化不幸袞貞輩一夜之間從神武門潛入釀成己卯罔測之禍先生遂有此耽羅之行竟受」

後命東城內有判書井古址圭菴宋先生諱麟壽字眉?諡文忠以己卯之淵源爲乙巳之領袖始因磁?之」

圖生大禍終爲鄭彦慤壁書之獄竟不免丁未之禍?牧?州南俗丕變有遺愛焉?陰金先生諱尙憲」

字叔度諡文正當我 崇禎皇帝丙丁之間天下之亂極矣身任禮義之大宗以樹綱常於旣壞尤菴先生曰」

若石室先生所謂千百年乃一人者而又得仙源先生於一家之天倫噫其盛矣曾在 宣廟朝以御史來」

臨于此桐溪鄭先生諱蘊字輝遠諡文簡當丙子講和之日以刃?腹幾殊僅甦與淸陰先生不顧一身禍」

福獨扶萬古綱常而?於昏朝同氣之變先生爭之曰今不能容一弟焉則他日以何面入 先王廟乎光海」

大怒遂竄于大靜遺墟立松竹祠爲縣士藏修之所尤菴宋先生諱時烈字英甫諡文正繼往開來大有功於」

斯文而闢異端陳王道距?淫息邪說使宋學後生誦其言法其事至今得免於夷狄禽獸之域者實」

功可擬於抑洪水驅猛獸而先生?以尊攘爲己任亦朱夫子心法故?曰朱子是孔子後一」

人余亦曰先生是朱子後一人也噫五先生之所講不出乎周程朱四夫子之道矣其道學功業」

在人耳目而非末學之所敢知然惟我尤菴宋先生以栗谷沙溪二先生之嫡傳旣承?圭諸先」

生之正脈而其所秉執之大義則於淸桐二先生之事尤有光矣先輩所謂尤菴先生卽集東儒」

大成云者信的論也 肅廟己巳三月入來?踰月被逮而去受 後命於中道己巳之禍尙忍言」

哉先生?戒武人曰書生投筆古亦有之而今日所望不但玉門關外事而己一部春秋亦不可不」

讀小子於此深有所??服膺粗解春秋之義故雖?悅孫吳之術慕賢之誠則倍切餘人修治」

先生遺墟碑閣?建書院外大門及內神門而新之因伐石而遂立牲繫于三分一之庭而刻文」

其上云時」

崇禎紀元後四上章?茂四月日 通政大夫濟州牧使玉山後學張寅植述


귤림서원묘정비기(橘林書院廟庭碑記)


탐라성(耽羅城)의 남쪽에 예로부터 충암(沖菴 김정)의 사당(祠堂)이 있어 평정공(平靖公) 이약동(李約東)과 함께 배향(配享)하였는데, 평정공은 바로 이 제주(濟州)에서 목사(牧使)를 지내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드러났었다.

숙묘(肅廟) 을묘년(숙종 1, 1675년)에 지호(芝湖) 이선(李選)이 순무(巡撫)하는 길에 충암 선생(沖菴先生)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로 볼 때 한 사당에 같이 배향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옆에다가 향사(鄕祠)를 별도로 짓고 평정공을 옮겨 봉안(奉安)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영해사(永惠祠)’이다.

숙종(肅宗) 8년 임술년(숙종 8, 1682년)에 송규암(宋圭菴 : 송인수), 김청음(金淸陰 : 김상헌), 정동계(鄭桐溪 정온) 세 선생을 함께 배향하여 서원(書院)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하사(下賜)하여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 :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다섯 선생은 학문은 비록 길을 달리했으나 도(道)의 귀착점(歸着點)은 서로 같았으니, 대개 인의(仁義)를 성(性)으로 삼고 충효(忠孝)를 행(行)으로 삼으며, 성현(聖賢)을 법(法)으로 삼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을 공(功)으로 삼았다.

충암 김선생(金先生)은 휘(諱)가 정(淨)이요, 자(字)는 원충(元?)이며,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중묘(中廟) 때에 요순(堯舜) 시대와 같은 다스림에 뜻을 두어서 정암(靜菴) 조선생(趙先生 : 조광조)과 마음을 합하여 도와서 삼대(三代)처럼 성인(聖人)의 교화(敎化)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무리들이 하룻밤 사이에 신무문(神武門)으로 몰래 들어와 기묘년(중종 14, 1519년)의 측량할 수 없는 사화(士禍)를 빚어냈다. 그리하여 선생이 마침내 이처럼 탐라로 유배(流配) 당하는 일이 있게 되었고, 결국 사약(賜藥)을 받았다. 성(城) 동쪽 모퉁이에 판서정(判書井)의 옛터가 있다.

규암 송선생(宋先生)은 휘가 인수(麟壽)요, 자는 미수(眉守)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연원(淵源)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처음에 허자(許磁)와 이기(李?)가 큰 사화에서 살아나려고 하는 술수(術數)로 인하여 결국에는 정언당(鄭彦戇)의 벽서(壁書) 사건으로 귀결(歸結)되어 정미사화(丁未士禍)를 면치 못하였다. 일찍이 여기 제주에서 목사를 지낼 때 남쪽 지방의 풍속을 크게 변화시켜 백성에게 사랑을 남겨주는 덕(德)이 있었다.

청음 김 선생은 휘가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명나라 숭정(崇禎) 병자년(인조 14, 1636년)과 정축년(인조 15, 1637년) 사이에 천하의 난리가 극에 달하였는데, 자신이 예의(禮義)의 대종(大宗)을 자임(自任)하여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강상(綱常)을 수립하였다. 우암선생(尤菴先生)이 말하기를, “석실 선생(石室先生 : 김상헌)과 같은 분은 이른바 천년 백년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다. 게다가 또 한 집안의 형제 중에서 선원선생(仙源先生 : 김상용)을 얻었으니, 아! 성대하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선묘(宣廟) 때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이곳에 왕림(枉臨)하였었다.

동계 정선생(鄭先生)은 휘가 온(蘊)이요, 자는 휘원(輝遠)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청(靑) 나라와 화친(和親)을 맺는 때를 당하여 칼로 배를 찔러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겨우 소생하였다. 청음선생(淸陰先生)과 함께 일신(一身)의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 홀로 만고(萬古)에 변치 않을 강상을 붙들어 세웠다. 일찍이 혼조(昏朝) 때에 동기(同氣)의 변고(變故)가 일어나자 선생이 간쟁(諫爭)하기를, “지금 동생 하나를 용납하지 못한다면 뒷날에 무슨 낯으로 선왕(先王)의 사당에 들어가시겠습니까?”라고 하니, 광해군(光海君)이 크게 노하여 대정현(大靜縣)에 찬배(竄配)하였다. 유배지(流配地)의 옛터에 송죽사(松竹祠)를 세워 대정현의 선비들이 면학(勉學)하는 장소로 삼았다.

우암 송선생은 휘가 시열(時烈)이요, 자는 영보(英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과거의 성인을 계승(繼承)하고 미래의 학자(學者)를 열어주는데 크게 공로(功勞)가 있어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며 왕도(王道)를 진술(陳述)하고 편파적인 말과 방탕한 말을 막으며 사설(邪說)을 종식(終熄)시켜 후학(後學)과 후생(後生)으로 하여금 그 말을 외고 그 일을 본받게 하였다. 지금까지 오랑캐와 금수(禽獸)의 지경에서 ~마멸~ 그 공로는 홍수(洪水)를 막고 맹수(猛獸)를 쫓아낸 것에 비길 수 있다. 선생은 일찍이 주(周) 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는데, 이것은 또한 주부자(朱夫子)의 심법(心法)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주자(朱子)는 공자(孔子) 이후에 일인자(一人者)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말하기를, “선생은 주자 이후에 일인자이다.”라고 하였다.

아! 다섯 선생이 익힌 것은 주렴계(周濂溪), 정명도(鄭明道), 정이천(鄭伊川), 주회암(朱晦庵) 네 부자(夫子)의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의 도학(道學)과 공업(功業)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있어 후학이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우암송 선생은 율곡(栗谷 : 이이)과 사계(沙溪 : 김장생) 두 선생의 학통(學統)을 정통으로 전해 받은 사람으로 이미 ~마멸~ 여러 선생의 정맥(正脈)을 이어받았으나 그들이 잡아서 지킨 대의(大義)로 말하면 청음과 동계 두 선생의 일에서 더욱 빛이 났다. 우암 선생은 동유(東儒)를 집대성(集大成)한 자라고 하면 참으로 확실한 논평(論評)이라고 하겠다. 숙종(肅宗) 기사년(숙종 15, 1689년) 2월에 제주에 들어와서 한 달을 넘기자마자 체포되어 떠나갔다가 중도(中道)에서 사약을 받았다. 기사년의 화(禍)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일찍이 무인(武人)들에게 경계하기를, “서생(書生) 중에 붓을 집어던지고 무인이 된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으나 요즈음에 바라는 것은 옥문관(玉門關) 밖의 일 뿐만이 아니다. 한 권의『춘추(春秋)』도 읽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소자(小子)가 이에 정성스럽게 가슴 속에 간직하는 바가 있어 춘추의 의리를 대략이나마 깨달았다. 그러므로 손자(孫子) · 오자(吳子)의 병법(兵法)을 늦게 좋아하게 되었으나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유허비각(遺墟碑閣)을 수리하고 서원 밖의 대문과 안의 신문(神門)을 창건(創建)하여 새롭게 하였다. 그에 따라 돌을 깎아 마침내 뜰의 3분의 일 되는 지점에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생몰(生沒)을 새겼다.

때는 숭정기원후 네 번째 경술년(철종 1, 1850년) 4월 일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제주 목사(濟州牧使)인 옥산(玉山)의 후학(後學) 장인식(張寅植)이 비문을 찬술(撰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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