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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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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산해정
명칭 내암집(來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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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十二 - 行狀 - 南冥曺先生行狀 隆慶六年壬申閏二月日
先生姓曺氏。諱植。字楗仲。系出昌山。高麗太祖德宮公主下嫁。生子瑞。爲刑部員外郞。於先生始祖。高祖諱殷。中郞將。妣郭氏。縣監興仁之女。曾王父諱安習。成均生員。妣文氏。學諭可容之女。王父諱永。不仕。妣趙氏。監察瓚之女。考諱彦亨。通訓大夫承文院判校。娶忠順衛李菊女。以弘治辛酉六月壬寅。生先生於嘉樹縣之兔洞。未冠。以功名文章自期。有駕一世軼千古之意。讀書喜左柳文字。製作好奇高。不屑爲世體。屢捷發解。名震士林。嘉靖丙戌。遭先大夫憂。廬墓終三年。先生家世淸貧。授室金官。婦家頗饒。奉母夫人就養。乙巳丁憂。奉柩還葬于先大夫墓東岡。廬墓如初。身不脫衰。足不出廬。服闋因居本業。近舊宅構一室曰鷄伏堂。俯前流結茅屋曰雷龍舍。使工畫者摹雷龍狀棲諸壁。晩卜頭流山下。其室復以雷龍名。別構精舍。扁曰山天齋。老焉。先生豪邁不羣。明見高識。出於天性。中廟丁酉。先生年三十七。于時國家無朝夕之虞。獨見有憂違之幾。遂請命先夫人。棄擧子業。筮遯山林。愛宜春之明鏡臺。往來接息。累歲月。作山海亭于金官之炭洞。講學蓄德。不願乎外者亦有年矣。中廟始授獻陵參奉不就。明廟除爲主簿。典牲也宗簿也。又除爲縣監丹城也。皆不就。上疏不報。其後又授司紙不就。丙寅以遺逸召辭。復以尙瑞院判官徵。乃拜命引對思政殿。上問治亂之道爲學之方。
선생의 성은 조(曺),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태조의 딸 덕궁공주(德宮公主)가 하가(下嫁)하여 아들 서(瑞)를 낳았는데,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선생의 시조가 된다. 고조 휘 은(殷)은 중랑장을 지냈고, 고조비 곽씨(郭氏)는 현감 곽흥인(郭興仁)의 딸이다. 증조부 휘 안습(安習)은 성균 생원이고 증조비 문씨(文氏)는 학유 문가용(文可容)의 딸이다. 조부 휘 영(永)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비 조씨(趙氏)는 감찰 조찬(趙瓚)의 딸이다. 부친 휘 언형(彦亨)은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를 지냈는데,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 6월 임인에 가수현(嘉樹縣) 토동(兎洞)에서 선생을 낳았다.
관례를 올리기 전부터 공명과 문장을 이루리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당시 세상을 압도하고 천고의 옛날 사람들을 능가할 뜻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는 《춘추좌씨전》과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좋아했고 글을 지을 때는 기이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여, 당시 세상에 유행하는 문체로 짓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다.
가정 병술년(1526, 중종21)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선생은 집안이 대대로 청빈했다. 김해로 장가들었는데, 처가가 자못 부유했으므로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봉양했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시신을 담은 관을 모시고 삼가현으로 돌아와 부친의 묘소 동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여묘살이를 부친상 때와 같이 했는데, 몸에서 상복을 벗지 않았고 발걸음은 움막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을 마치자 원래 살던 집으로 되돌아왔다. 옛날 살던 집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어 ‘계부당(鷄伏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는 곳에 띠집을 지어 ‘뇌룡사(雷龍舍)’라고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우레와 용의 모양을 그려 벽에 붙여 두었다. 만년에 두류산 아래에 자리 잡았는데, 그 집을 다시 ‘뇌룡사’라고 이름 지었다. 따로 정사를 하나 지어 ‘산천재(山川齋)’라는 편액을 내걸고, 거기서 노년을 보냈다.
선생의 호방하고 고상한 성품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으며, 밝고 높은 식견은 천성에서 나왔다. 중종 정유년(1537) 선생의 연세가 37세 때였다. 당시는 나라에 곧 닥칠 환난이 없었지만, 선생 혼자 걱정스럽게 잘못되어가는 기미를 보시고 마침내 어머님께 요청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산림에 숨기로 마음을 먹었다.
의령의 명경대를 사랑하여 오가며 깃들어 지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 김해의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강학하면서 덕을 쌓았는데, 이름이나 이익 등 외부적인 것을 원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종 때 비로소 헌릉 참봉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 때 전생서 주부,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고, 또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상소를 했으나 임금의 답이 없었다. 그 뒤 또 조지서 사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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