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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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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산해정
명칭 순암집(順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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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안정복(安鼎福)
소장정보

상세정보

卷之二十一 - 墓碣 - 英陵參奉林泉裵公墓碣銘
昔我明陵辛巳。嶺南紳士建道泉祠于鷲城。以祀鄕先生。林泉裵公其一也。鼎福生晩。未之聞也。今年癸巳。始識公後孫相度。按其先。故盆城世家也。公諱鶴。字太冲。自鼻祖盆城君元龍。歷六世至諱縉。入本朝。官司憲府監察。監察生諱仲厚進士。進士生諱世緝副司直。卽公曾祖考三世也。妣鷲城辛氏。縣監永理女。公以弘治戊午。生于靈山縣之鄕校洞。天姿溫仁。事親至孝。及遭內外艱。歠粥守廬。晨夕哭省。雨雪豺虎不少避。終三年如一日。喪祭諸節。一遵文公定禮。嘉靖乙未。擧遺逸除英陵參奉。不赴。公志尙高遠。自早歲絶意進取。專心性理。闢書室于竹林中。藏修涵養。若將老焉。自號林泉。周愼齋世鵬嘗雪中寄詩云。君看武陵雪。遙連鷲山雲。又訪公題詩壁上。有云一訪癯仙竹院中。留詩半日坐淸風。南冥曹先生亦邀公於山海亭。連床咬菜。談討義理。其爲當時名德之所敬重如是。隆慶己巳十二月初九日卒。壽七十二。公同閈友李公中。學問士也。師事金大成湜。己卯禍作。大成來投李公。李公舍匿之。公亦與知。及事發。李公被逮鞠訊。竟不告與公同事狀。故公得免。由是公義李公甚。臨終囑子弟曰。吾與而強。有泉壤相須之義。葬必相傍。而強李公字也。時李公已歿。葬于縣東靑巖山。至是葬公。與之同壠。後以宅兆不利。遷厝于縣西廣池山卯坐原。公娶一善金氏。忠順衛光晣女。墓在靑巖山某坐原。生三男一女。男長湜。次渶有文行。贈吏曹參判。次澐。女適朴斯立。湜,澐俱無子。渶有二男大維,大綸。大維官承旨。號慕亭。以文章筆法名世。二子弘祐說書,弘祿府使。各有二子。曰敬徵,敬徽,敬善,敬宸。大綸二子弘祉,弘禮。俱以孝友稱。弘祉子命胤。亦以孝行。贈工曹佐郞。弘禮三子命契,命益,命說。今其世遠者。至七世八世。公之嘉言懿行。世久湮沒。而權蒼雪斗經撰春秋享祀祝曰。孝著家庭。趣高山林。學問功專。師友資深。人謂之實錄。是皆可傳者也。銘曰。
傳有之云士尙志。又曰遯世不見知而不悔。若裵公者。其類是矣。名存士林。慶流後昆。欲知公德。請徵斯文。
옛적 우리 명릉(明陵 숙종의 능호) 신사년(1701, 숙종 27)에 영남의 선비들이 취성(鷲城 영산(靈山)의 옛 이름)에 도천사(道泉祠)를 건립하여 향선생(鄕先生)의 향사를 받들었는데, 임천(林泉) 배공(裵公)도 향선생 가운데 한 분이셨다. 정복(鼎福)이 늦게 태어나 미처 듣지를 못하였다가, 금년 계사년(1773, 영조 49)에 처음으로 공의 후손 상도(相度)를 알게 되어 그 선계를 살펴보니 분성(盆城)의 세가(世家)였다.
공의 휘는 학(鶴), 자는 태충(太冲)이다. 시조 분성군 원룡(元龍)으로부터 6대를 지나 휘 진(縉)에 이르렀는데 조선에 들어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감찰공이 휘 중후(仲厚)를 낳으니 진사이고, 진사공이 휘 즙(緝)을 낳으니 부사직인데 곧 공의 증조ㆍ조부ㆍ부친의 3대이다. 모친은 영산신씨(靈山辛氏)로 현감 영리(永理)의 따님이다.
공은 홍치(弘治) 무오년(1498, 연산군 4)에 영산현 향교동에서 태어났는데,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고 인후하였다. 어버이를 섬기기에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부모상을 당해서는 죽을 마시고 여막에서 지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울면서 성묘하기를 눈비가 내리거나 사나운 짐승이 있어도 조금도 피하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그리고 상례와 제례의 여러 절차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이 제정한 예를 따랐다.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 30)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고원한 뜻을 지녀 어릴 때부터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 성리(性理)에 전심하여, 죽림(竹林) 가운데 서실을 짓고 여기에 은거하여 자신을 함양하면서 장차 노년을 보낼 듯이 하고, 임천(林泉)이라고 자호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일찍이 눈 내리는 날에 시를 보내기를,
그대여 무릉의 눈을 보게나 / 君看武陵雪
아득히 영산의 구름이 이었네 / 遙連鷲山雲
하였고, 또 공을 방문하여 벽에 시를 적었는데,
여윈 신선의 죽원 가운데 방문하여 / 一訪癯仙竹院中
시를 남기고 반나절을 청풍에 앉았구려 / 留詩半日坐淸風
라고 하였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도 또한 김해에 있는 산해정(山海亭)에서 공을 맞이하여 상을 나란히 하여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의리를 담론했다. 공이 당시 명덕(名德)의 공경과 추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 2) 12월 9일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72세였다.
공과 동향의 벗 이공 중(李公中)은 학문하는 선비였는데, 대성(大成) 김식(金湜)을 사사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대성이 이공에게 와서 몸을 의탁했는데, 이공이 이를 숨겨 주었던 사실을 공도 또한 알고 있었다. 일이 발각되기에 이르러 이공이 체포당하여 신문을 받았는데, 끝내 공과 함께 일을 같이한 정상을 고하지 않았으므로 공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은 이공을 매우 의롭게 여겨, 임종 때 자제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이강(而强)과 지하에서도 서로 따를 의리가 있으니 장지는 반드시 그의 무덤 곁을 택하도록 해라.” 하였는데, 이강은 이공의 자(字)이다. 이 때에 이공은 이미 세상을 떠나 현의 동쪽 청암산(靑巖山)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공을 안장하니 이공과 같은 곳이었다. 후에 무덤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현의 서쪽 광지산(廣池山) 묘좌(卯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은 일선김씨(一善金氏) 충순위 광제(光晣)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의 묘소는 청암산 모좌(某坐) 언덕에 있다.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식(湜)이고, 차남은 영(渶)인데, 문행(文行)이 있었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삼남은 운(澐)이다. 딸은 박사립(朴斯立)에게 출가했다. 식과 운은 모두 아들이 없다. 영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대유(大維)와 대륜(大綸)이다. 대유는 관직이 승지이고 호는 모정(慕亭)이었는데 문장과 필법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홍우(弘祐)는 설서이고, 차남 홍록(弘祿)은 부사이다. 이들도 각각 두 아들을 두었는데 경징(敬徵)ㆍ경휘(敬徽)와 경선(敬善)ㆍ경신(敬宸)이다. 대륜의 두 아들은 홍지(弘祉)와 홍례(弘禮)인데 모두 효성과 우애로 칭송을 받았다. 홍지의 아들 명윤(命胤)도 또한 효행으로 공조 좌랑에 증직되었다. 홍례의 세 아들은 명설(命契)ㆍ명익(命益)ㆍ명열(命說)이다. 지금 그 대수가 먼 사람은 7, 8세에 이르렀다.
공의 아름다운 언행은 세대가 오래 되어 인멸하였으나,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이 춘추로 드리는 향사의 축문을 지으면서,
효우는 가정에 드러나고 / 孝著家庭
아취는 산림에 높았도다 / 趣高山林
학문함에 공부가 전일하고 / 學問功專
사우간에 얻음이 깊었도다 / 師友資深
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를 두고 실록(實錄)이라고 한다. 이는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이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옛 전에 선비는 뜻을 숭상한다 하고 / 傳有之云士尙志
또 세상 숨어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 없다 하니 / 又曰遁世不見知而不悔
배공과 같은 이가 여기에 가깝도다 / 若裵公者其類是矣
명성은 사림에 남아 있고 / 名存士林
경사는 후손에 흘러 전하네 / 慶流後昆
공의 덕을 알고자 한다면 / 欲知公德
이 글에서 살펴보기 바라네 / 請徵斯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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