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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안동시
사빈서원 - 泗濱書院

사빈서원은 김진(金璡)과 그의 아들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 김복일(金復一)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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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문화재청 홈페이지
위치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광산길 53 (천전리) 천전리 637
건립연도 1675
제향인 김진, 김극일, 김수일, 김명일, 김성일, 김복일
문화재 지정 표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이칭 / 별칭
기타 서원

상세정보

사빈서원은 김진(金璡),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 김복일(金復一)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김진[1500~1580]16세에 고모부인 권간(權幹)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영양 청기(靑杞) 초동(椒洞)으로 들어가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극일김수일김명일김성일김복일 다섯 아들을 이황에게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다.

맏아들 김극일[1522~1585]1546(명종 원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주목사, 밀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김수일[1528~1583]1555(명종 1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집 서쪽 부암(傅巖) 위에 정자를 짓고 수양하였다. 스승 이황으로부터 心學을 논하여 크게 칭찬 받은 바 있으며 1580(선조 13) 부친이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3년간 하였다. 이후 유일로 천거되어 자여도 찰방을 제수받았으나 오랜 병으로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셋째아들 김명일[1534~1570]은 소수서원에서 독서할 때 황준량(黃俊良)과 도의지교로 사귀었고, 이황으로부터 箴銘이라는 글자를 받았다. 형 수일·동생 복일과 함께 대과에 응시하러 서울로 갔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넷째 아들 김성일[1538~1593]1556(명종 11) 이황 문하에 나아가 서경·역학계몽(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大學疑義)등을 배우고 1564(명종 19) 진사시에 합격, 1568(선조 1) 문과에 급제하였다. 나주목사 시절 대곡서원(大谷書院)을 건립하여 문풍진작에 기여하였다. 1590(선조 23)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보고하였다가,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서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며 1593(선조 26) 진주 진영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막내 아들 김복일[1541~1591]1564(명종 19) 진사시에 합격, 1570(선조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안동에 이황을 제향하는 廬江書院이 건립되자 청액소를 작성하였다.

사빈서원은 1675(숙종 원년) 경출산(景出山) 아래 분암(墳巖)을 확장하여 묘우(廟宇)를 건립하고 김진의 유상(遺像)을 봉안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1681(숙종 7) 사림과 후손들이 사당 건립을 논의하여 1685(숙종 11) 景德祠를 창건하였고 1709(숙종 35) 사빈서원으로 승원하였다. 1717(숙종 43) 어사 박명언(朴明彦)의 별훼주청(別毁奏請)으로 철폐령(撤廢令)이 내려짐에 따라 이산두(李山斗)를 소두로 하여 서원이 아닌 영당으로 창건되었음을 알림으로써 훼철을 면하였다. 이후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2년 후손 및 사림에 의해 강당과, 주사(廚舍)를 복원하였다. 19858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임하리로 이건, 2005년 강당, 주사를 현재 위치로 이건하고, 사당·동재·서재·전사청·누각 등을 신축하였다2021년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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