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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안동시
임천서원 - 臨川書院

임천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인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단독으로 제향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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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문화재청 홈페이지
위치 경북 안동시 송현동 740
건립연도 1568
제향인 김성일
문화재 지정 표기 경상북도 기념물
이칭 / 별칭
기타 서원

상세정보

임천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인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단독으로 제향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김성일은 1556(명종 11) 이황 문하에 나아가 서경·역학계몽(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大學疑義)등을 배우고 1564(명종 19) 진사시에 합격, 1568(선조 1) 문과에 급제하였다. 나주목사 시절 대곡서원(大谷書院)을 건립하여 문풍진작에 기여하였다. 1590(선조 23)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보고하였다가,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서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며 1593(선조 26) 진주 진영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천서원은 김성일의 형 김명일(金明一)을 중심으로 1568(선조 1) 건립된 임천서당(臨川書堂)이 그 시작이다. 의성김씨 자제들의 교육 공간으로 기능하였으며 1607(선조 40) 임천향사(臨川鄕社)로 만들어 김성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8(광해군 10) 임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620(광해군 12) 안동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이황과 김성일·류성룡을 제향하면서 임천서원에 있던 김성일의 위패를 옮겨갔다.

여강서원은 안동에서 이황을 제향하는 유일한 서원이었고, 병산서원 원장 김봉조(金奉祖)가 평소 류성룡이 서원 난립에 대해 우려를 표한 점, 안동에 여강·임천·병산 3개서원이 난립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들며 김성일·류성룡의 여강서원의 합향을 제안하였다. 이에 임천·병산서원은 사당은 모두 위패가 없이 비워진 상태가 되었고, 이때부터 병산서원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여, 1629(인조 7) 여강서원과는 별도로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반면 김성일의 후손과 문인들은 여강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임천서원의 사당은 계속 비워진 상태였다. 이후 임천서원은 임천서당으로 존속하였으나 점차 쇠락의 단계를 거쳐 사빈서원(泗濱書院) 건립 직후 모든 재산이 이관되었다.

임천서당의 중건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03(순조 3) 3월 무렵이다. 안동 구계서원(龜溪書院)에서 이중조(李重祖조정엽(趙廷燁) 등이 발의하고 50여 인이 동의하여 의성김씨 본가로 문의가 이루어졌다. 다음 달 사빈서원 문회에서 임천서당의 중건을 확정짓고 공사에 들어갔다. 1808(순조 8) 당장(堂長)으로 류범휴(柳範休), 당유사(堂有司)로 이종주(李宗周김양운(金養運)을 선발하여 서당의 기능을 회복하였으며 1812(순조 12) 백일장을 개최하였다. 이후 1847(헌종 13) 김성일이 강의하던 석문정사(石門精舍) 서편에 임천서원을 복설하였으나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면서 훼철되었다. 1908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고 19858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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