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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안동시
호계서원 - 虎溪書院

호계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이황(李滉)[1501~1570]과 그의 문인 김성일(金誠一)[1538~1593],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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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문화재청 홈페이지
위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3, 84-4
건립연도 1575
제향인 유성룡, 김성일, 이황
문화재 지정 표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이칭 / 별칭
기타 서원

상세정보

호계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이황(李滉)[1501~1570]과 그의 문인 김성일(金誠一)[1538~1593],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이황은 1501(연산군 7)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숙부인 이우(李堣)에게 논어를 배웠고 20세를 전후하여 주역에 몰두하였다. 1528(중종 23) 진사시에 합격, 1534(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였다. 33세 성균관에 있을 무렵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탐구하였고, 43세에 주자전서(朱子全書)연구하였다. 53세에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변을 한 바 있다.호조좌랑, 홍문관부수찬, 충청도어사, 홍문관교리,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김성일은 1556(명종 11) 이황 문하에 나아가 서경·역학계몽(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大學疑義)등을 배우고 1568(선조 1) 문과에 급제하였다. 나주목사 시절 대곡서원(大谷書院)을 건립하여 문풍진작에 기여하였다. 1590(선조 23)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보고하였다가,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서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며 1593(선조 26) 진주 진영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류성룡은 1562(명종 17) 21세에 이황의 문인이 되었으며 1566(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성균관전적, 공조좌랑, 홍문관수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서 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을 지휘하였다.

호계서원은 1573(선조 6) 易東書院에서 퇴계집을 교정하던 이황의 문인들이 스승을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을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1575(선조 8) 백련사(白蓮寺) 자리에 서원을 건립하고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 하였다. 1576(선조 9)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605(선조 38) 대홍수로 서원이 유실되자 이듬해 문인 안동부사 김륵(金玏), 류성룡 등이 주도하여 중건하였다. 그리고 1619(광해군 11) 류성룡 문인이던 여강서원 원장 김봉조(金奉祖)가 임천서원 원장 정전(鄭佺)과 함께 김성일·류성룡의 합향을 제의하였고 1년 뒤 정경세의 품정을 받아 위패를 봉안하였다. 1630(인조 8)부터 1650(효종 원년) 남치리(南致利)에 대한 추향논의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1676(숙종 2) 호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류성룡·김성일의 위차와 호칭 등의 문제로 류성룡을 제향하는 병산서원과의 갈등[병호시비]이 있었다. 1870년 호계서원 숭교당(崇敎堂)에서 병호 유생들의 보합 동의가 무산되면서 1871년 훼철되었다. 이후 1878년 강당을 복원하고,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임하리로 이건하였다. 같은 해 8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습기 등의 문제로 다시 이건 논의가 진행되어 2019년 현재 위치로 이건하여 복원하였다2021년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