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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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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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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사빈서원
명칭 『泗濱書院創建時日記』
문화재 지정 표기
작성주체 泗濱書院
작성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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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문자:

상세정보

◦ 『泗濱書院創建時日記, 1675, 泗濱書院 (출처: 유교넷)

歲乙卯 ...... 仍爲發文通告各處 定米布收合有司 川前金士達金台重 秋月金夏鉉 臨南金三重 水谷柳昌輝柳益輝 金溪金啓基金以鐸 豐山縣內李野星 新基南金寶 蘇山金行榘 河回柳後昌 乃城權濡金懋柳宗海 佳丘琴以正 陶木裵昶 一直金碩基李台徵 松夜權聖矩 金宇基松川柳綱立 居黙柳營海 道村權以錘 苧田金守緘 周村李壽崐 桂谷裵聖佑 春陽金觀基 九潭申錢 府內李後榮 水沈庶孼康一桂 申谷庶孼朴文亨 龍宮全五福鄭宗鍵 呂泉金聖基權愭 豐基安萬繞 禮安李櫰金檍 榮川金輝鳳張璶黃昌建 尙州趙元胤金淰金炡 咸昌崔遠基洪道一 善山金正基崔大乾 義城申斗錫 寧海朴夏相勸相益 英陽趙(+)趙顒 慶州李(+)凡五十四人 其通文 略曰 惟我先祖 贈判書靑溪公 流風餘澤之在人耳目者 豈但爲子孫之追慕而已哉 玆於景出山下 創建精舍 將以奉安遺像 而事鉅力綿 恐難成樣 伏願僉尊 隨力顧助 俾之克成大事云云 時則七月二十五日也 於是遠近 無不興起 各出米布以助 各處洞內及子孫 扶助合米粗 五十餘石 布百餘匹 仁同張羽溟金重孫 以孤山伏在田 永屬本堂 寧海前參奉朴滈 龍宮蔡文徵 別出米布以助

1675725일에 사당 건립을 위한 공지문通文을 발송하였다. 사당은 김진(金璡, 15001580)을 모실 곳이었고, 공지문은 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공지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선조 증 판서 청계공의 유풍 여택이 사람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을 어찌 다만 자손들만이 추모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에 경출산(景出山) 아래 정사를 창건하여 장차 영정을 봉안하려 합니다. 그러나 일은 크고 힘은 부족하여 모양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여러분들께서는 능력에 따라 부조하여 능히 대사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작성된 공지문通文을 각 지역에 통고하였고, 이어서 쌀과 베를 거둘어 올 실무자米布收合有司를 각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54명을 정하였다.

천전 : 김사달(金士達) 김태중(金台重)

추월 : 김하현(金夏鉉)

임남 : 김삼중(金三重)

수곡 : 류창휘(柳昌輝류익휘(柳益輝)

김계 : 김계기(金啓基김이탁(金以鐸)

풍산 : 현내(縣內)의 이야성(李野星)과 신기(新基)의 남금보(南金寶)

소산 : 김행구(金行榘)

하회 : 류후창(柳後昌)

내성 : 권유(權濡김무(金懋류종해(柳宗海)

가구 : 금이정(琴以正)

도목 : 배창(裵昶)

일직 : 김석기(金碩基이태징(李台徵)

송야 : 권성구(權聖矩김우기(金宇基)

송천 : 류강입(柳綱立)

거묵 : 류영해(柳營海)

도촌 : 권이추(權以錘)

저전 : 김수함(金守緘)

주촌 : 이수곤(李壽崐)

계곡 : 배성우(裵聖佑)

춘양 : 김관기(金觀基)

구담 : 신전(申錢)

부내 : 이후영(李後榮)

수침 : 서얼 강일계(康一桂)

신곡 : 서얼 박문형(朴文亨)

용궁 : 전오복(全五福정종건(鄭宗鍵)

여천 : 김성기(金聖基권기(權愭)

풍기 : 안만요(安萬繞)

예안 : 이회(李櫰김억(金檍)

영천 : 김휘봉(金輝鳳장신(張璶황창건(黃昌建)

상주 : 조원윤(趙元胤김심(金淰김정(金炡)

함창 : 최원기(崔遠基홍도일(洪道一)

선산 : 김정기(金正基최대건(崔大乾)

의성 : 신두석(申斗錫)

영해 : 박하상(朴夏相권상익(勸相益)

영양 : 조구(趙求+조옹(趙顒)

경주 : 이학(李土+)

이후 원근에 사는 사람들이 공감하였고, 이에 각기 미곡과 포백을 부조하였다. 각 지역의 동내외 후손들이 부조하였는데, 모두 나락 50여 석과 베 100여 필이였다. 인동의 장우명(張羽溟)과 김중손(金重孫)은 고산에 있는 밭을 영당에 귀속시켜 주었고, 영해의 전 참봉 박호(朴滈)와 용궁의 채문징(蔡文徵)은 별도로 쌀과 베를 부조하였다.

 

乙丑 正月二十二日 ...... 先生內外孫 以奉安事 會于本堂 一縣士林 聞風來會 咸曰先生之餘芬遺像 在人耳目 百世之下 瞻者起敬 而五先生德業文章 蔚然爲一世儒賢 則今此崇奉之擧 非子孫之榮 乃士林之慶也 於是 相與發文 通告列邑鄕校書院 其文曰 好德本於秉彛 象賢出於至誠 此實人情之所同而不容已也 竊惟靑溪金先生 早就有道 得聞緖論 學業大進 華聞日暢 一時從遊之士 皆碩德之儒 而河西金先生麟厚 情義密尤 聯床講劘 與之相獎 其進德不已之誠 大爲當世名賢之所稱許 而敦孝友 作人才 毁淫祀 詎詖行 鶴峯金先生所撰行狀 及愚伏鄭先生所撰碣銘中 盡之矣 噫樑摧已逖 墻慕彌深 遺像凜然 瞻者起敬 則豈但聞風興起而已哉 至若藥峯龜峯雲巖鶴峯南岳五先生 承訓於家庭之內 而就正於退陶先生之門 俱蒙獎掖 蔚然爲一世儒賢 鄕邦之聳慕 士林之矜式 歷百年如一日 則吾黨崇奉之擧 烏可已也 况此景山 則靑溪先生平日杖屨之地 而衣冠之藏 又在其上 藥峯詩 所謂五人共守一山隅 入地要期左右扶者 此也 千秋在天之靈 想應陟降於此 而一壑雲烟 猶帶餘芬 則指點徘徊 其無感愴之思乎 惜乎 董子陵下 雖切下馬之誠 徐孺墓前 尙欠思賢之社 此誠斯文之欠典 而吾黨之深恥也 十餘年前 一邦之人 齊聲合議 謀所以俎豆於此 而旋以時屈而止 人心猶鬱 久而尤篤 今者先生內外孫 創建廟宇 揭安遺像 仍爲五先生祔享之計 允合於古人三徐四令之制 而亦愜於後學景賢尙德之心 正與聞喜之董澤 餘干之南溪 異世而同事矣 玆於三月七日丁卯 一邦多士 將擧縟儀 伏願僉君子 特賜賁臨 用觀厥成 幸甚云云 士林出文 ······· 百餘人

1684122일 김진(金璡: 15001580)의 내외 후손이 그의 아들 5형제를 봉안하는 일로 사빈영당에 모였다. 한 고을의 사림들이 모여 말하였다.

김진 선생의 향기가 여전하고餘芬그에 대한 기억이 여전하니遺像,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어 백대의 후에라도 사람들의 공경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 아들 다섯 선생의 덕업과 문장이 성대하여 일세의 유현이 되었으니, 이에 지금 높이 받들어 봉안하는 일은 자손에게 영광일 뿐 아니라 곧 사림의 경사이기도 하다.”

이에 서로 공지문을 발송하여 여러 고을의 향교와 서원에 알렸다. 그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덕을 좋아함은 사람의 천성에서 나오고 어진 이를 숭상함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니, 이는 실로 인정에 누구나 같아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청계 김 선생은 일찍이 도 있는 곳에 나아가 서론을 들어서 학업이 크게 진보하여 빛나는 명성이 날로 드러났습니다. 한 때에 종유하였던 선비가 모두 큰 덕을 지닌 선비들이었는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는 그 정의가 더욱 친밀하였다. 그와 자리를 함께 할 때는 강론 연마하여 서로 장려하니 그 덕을 증진하여 그치지 않았던 정성이 크게 당세의 명현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효성과 우애에 돈독하고 인재를 진작하며 무속의 사당을 허물고 치우친 행실을 물리친 일은 그 아들 학봉 선생이 지은 행장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지은 묘갈명 가운데 다 표현되어 있다.

! 동량이 부러진 지 이미 오래되어 추모하는 정성이 더욱 깊다. 영정이 엄숙하여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공경을 일으키게 하니, 어찌 다만 풍성(風聲)을 듣고 흥기할 뿐이겠습니까?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 등 다섯 선생 같은 분이 김진의 가르침을 받고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배워서 모두 장려를 받아 성대하게 일세의 유현이 되었다. 고을에서 사모하고 사림에서 본받음이 백 년을 지나도록 하루 같은 즉 우리 유림에서 높이 받드는 일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 경산은 청계 김진 선생이 평일에 걸으며 노닐던 곳이고, 묘소가 또 그 위에 있으니 약봉 김극일의 시에 이른바 다섯 아들이 함께 한 산 모퉁이를 지켜, 지하에 들어가서도 좌우로 모시기를 기약하네五人共守一山隅 入地要期左右扶.”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천추토록 하늘에 계시는 혼령이 아마 응당 여기에 오르내리고 한 골짜기의 구름과 안개가 오히려 남은 향기를 띠고 있은 즉, 가리키며 배회함에 슬픈 생각이 없겠습니까?

애석하도다! 동자(董子)의 무덤 아래 비록 말을 내릴 정성이 간절하나 서유(徐孺)의 묘소 앞에 오히려 전현을 생각하는 정사가 없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흠이 되는 예이고 우 유림의 깊은 수치입니다. 10여 년 전에 한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합의하여 여기에 제향을 받들 것을 도모하였으나, 문득 흉년이 든 것으로써 중지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답답하였는데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지금 선생의 내외 후손이 사당을 창건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이어서 다섯 선생을 부향(祔享)할 계획을 하니, 참으로 고인의 삼서묘(三徐廟사령사(四令祠)의 제도에 합하고 또 후학이 전현을 경모하고 어진 이를 숭상하는 마음이 참으로 문희(聞喜)의 동택(董澤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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