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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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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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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사빈서원
명칭 『臨川書堂重建日記』
문화재 지정 표기
작성주체 臨川書堂
작성지역 -
형태사항 크기:
장정:
수량:
재질:
표기문자:

상세정보

◦ 『臨川書堂重建日記, 臨川書堂 (출처: 유교넷)

嘉慶八年癸亥三月二十四日

自臨北龜溪書院會中發臨川書堂重建之論夫是論也默洞李重祖同水谷柳上舍廷燁首倡焉其略曰府東臨河縣大川上古有書堂扁其堂曰臨川名其樓曰峨洋中間爲鶴峯先生腏享之所俄擧廬江書院配食之禮移奉位版後其材瓦田土臧獲屬之泗濱影堂殆至數百年之久而其遺址列礎宛然如昨嗟呼先師播馥之地儒賢絃誦之場一朝變爲農夫耕犁之土牧童飯牛之谿豈不爲後人之所可慨然也哉蓋其形勝藥山峙其南岐山昂於東匡廬鏡浦在西北間內而有三峯孤山之伏藏其靈上下有七灘鯉淵之盤洄其流又距白雲亭不過數●●無讓於岳陽之萬千彷彿乎武夷之九曲且其東江一帶盡是當世堂員所居之鄕名門右族蔚興達人碩士輩出此眞文明絶特之地而荒廢多年藏修無期不但爲堂員子孫之所共歎慕而行路指點者亦莫不嗟惜肆昔吾鄕先父老每於要束會話之日必曰臨川書堂可重建云而第非一里一門之所主者又是天時地()之所係者各家宂故互掣各里弔慶不齊屢成參差有志未就者積有年所矣今於吾輩文會之日盍謀所以重建此書堂遵先父老之遺意乎柳上舍樂應曰善哉言乎此吾輩大議論因製通文數十行列書會員五十人直送于川前川前長老招致泗濱院隷卽爲輪傳于各面各里覽是通文者舊約子孫之外亦皆願入環在半鄕者無不影從而響應以斯速頓定爲期云爾通文略曰

 

1803(순조3)

324

임북 구계서원 모임 중에 임천서당을 중건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논의는 묵동 이중조가 수곡의 생원 류정엽과 함께 제일 먼저 주도하였다. 그 대략적 내용에, “안동부 동쪽 임하현 큰 냇가에 옛 서당이 있었으니, 그 집 편액을 임천서당이라 하고, 그 누각 이름을 아양루라 하였습니다. 중간에 학봉선생을 제사 드리는 장소로 삼았는데, 얼마 뒤 여강서원에서 선생을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위판을 그 곳으로 옮겨 모신 뒤, 재목과 기와 토지 노비 등을 사빈영당으로 소속시켰습니다. 이제 거의 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그 터가 남아 있고 주춧돌이 배열되어, 완연히 마치 어제 일인 듯합니다. 아하, 선사先師께서 학문을 전파하던 땅이요, 선비들이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던 터전이 하루아침에 농부가 밭가는 농토와 목동이 소먹이는 골짜기로 변하였으니, 이 어찌 후세 사람들이 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그 좋은 경관을 보자면, 남쪽에는 약산이 우뚝하고, 동쪽에는 기산이 높이 솟아 있으며, 광려와 경포가 서북쪽 사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삼봉과 고산이 그 신령함을 감추고 있고, 위 아래로 칠탄과 이연의 휘감아 도는 물길이 있으며, 또 백운정에서 거리가 불과 몇 리 되지 않아서, 악양루의 기상에 조금도 못지않고 무이구곡가 엇비슷합니다. 또 그 강 동쪽 일대는 모두 당시의 당원들께서 거주하던 고을로, 명문 우족右族이 성대하고 일어나고, 현달한 인물과 큰선비가 배출되었으니, 이곳은 참으로 문명이 탁월한 지역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하게 버려진 지 여러 해가 되어 묻혀 공부하기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당원 자손들이 다 함께 개탄하고 흠모할 뿐만 아니라, 길을 가며 가리키는 사람들 또한 탄식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날 우리 고을의 선대 어른들께서 매번 안동에 모여 이야기할 때마다 반드시 임천서당을 중건해야 한다고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한 가문에서 주관할 것이 아니고, 또 하늘의 시운과 땅의 운세가 관계되는 것인지라, 각 집안의 잡다한 일에 서로 얽매이고, 각 마을의 경조사가 이리저리 얽혀, 여러 차례 차질이 생겨 뜻을 가지고도 성취하지 못한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문회文會를 하는 이날, 어찌 이 서당을 중건하여 선대 어른들께서 남긴 뜻을 따를 방법을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생원 류정엽이 즐겁게 응답하여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말씀이여. 이는 우리들의 중대한 의논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십 행을 짓고 회원 50명이 차례로 서명을 하여 바로 천전川前으로 보냈더니, 천전의 장로長老가 사빈서원 소속 종들을 불러 즉시 각 면 각 마을에 돌려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 통문을 본 사람들은 옛날에 맹약했던 집안 자손들 외에도 다들 가입하기를 원했고, 반향半鄕 주위에 사는 사람들도 그림자처럼 따라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 일을 빨리 단번에 결정하기를 기대한다고들 하였다. 통문에 대략 이렇게 말하였다.

 

四月二十六日

因泗濱文會議定書堂重建事仍把任。…

사빈서원의 문회를 계기로 임천서당 중건의 일을 의논해서 확정하고, 곧 이어 임원을 정하였다.

 

(四月)二十七日

()()會員罷歸李奎運從諸長老直向臨川舊址。…

사빈서원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 마치고 돌아갔다. 이규운은 여러 장로들을 따라 바로 임천서당 옛 터로 갔다.

 

(二月)二十三日

朝泗濱院隷以疏廳名帖疏資事來見權就仁蓋以時當接任故也。…

아침에 사빈서원의 종이 소청의 명단과 상소에 필요한 자금 문제로 와서 권취인을 뵈었다. 대개 이 때 접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二月)二十八日

無資可辦故請出若干錢米於泗院接所木手等午點及酒料亦同之。…

돈을 마련할 수 없어서 이 때문에 사빈서원 접소에 약간의 돈과 쌀을 내 달라고 요청하였고, 목수의 점심과 술값도 같이 부탁하였다.

 

(三月)七日

權就仁以泗濱接任入參享禮金浩運獨監役

권취인은 사빈서원의 접임으로 향사에 참례하러 들어가고, 김호운 혼자 공사를 감독하였다.

 

(三月)二十四日

慶老所有司金碩行泗濱院接任金會運在座爲先請助於兩所慶老所出四兩錢接所出十緡錢停役之議還止。…

경로소 유사 김석행과 사빈서원의 접임 김회운이 자리에 있어서 우선 두 곳에 도움을 요청하니, 경로소에서 돈 4냥을 내고 접소에서 돈 10민을 내어, 공사를 중단하자는 논의가 다시 그쳤다.

 

(九月)六日

遠坡柳基源以泗濱齋任來觀秋獲于堂直家本村四五員因與遊話于書堂。…

원파의 류기원이 사빈서원 재임으로 와서 서당지기의 집에서 추수를 살펴 보았다. 본 마을 사람 너 댓 명이 이 때문에 서당에서 어울려 놀며 이야기하였다.

 

戊辰閏五月十六日

以泗濱書院■…■事期會而食後接有司柳浩休金廷喆率院隷設施支供凡節於本堂廚舍午後訓長柳上舍及水谷十餘員來會

사빈서원의 ○○○일 때문에 모이기로 하였는데, 식사 후 접소 유사 류호휴와 김정철이 서원 하인들을 거느리고 본 서당 부엌 채에서 시중드는 등의 여러 일을 조치하였다. 오후에 훈장 류상사와 수곡의 10여 분이 와 모였다.

 

己巳三月十六日

堂長顧謂諸長老曰堂宇旣成不可無財力當加收名錢求助於各里書堂又於慶老所及泗院別所以爲滋長之計如何僉曰唯唯乃出收錢有司發文回傳于各里各所堂有司金養運遭憂代望本村權瑩

당장이 여러 장로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서당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재력이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각 회원 몫의 돈을 더 거두고, 각 마을 서당에 도움을 청할 것이며, 또 경로소와 사빈서원 별소에서 재산을 불려나갈 계획을 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다들 좋다고 하였다. 이에 돈 거둘 유사를 선출하여 글을 보내 각 마을 각 처소에 신속히 전달하기로 하였다. 서당 유사 김양운이 근심스러운 일을 당하여 그 대신 본 마을 권형權瑩을 추천하였다.

 

七月

泗院別所有司金泰運幷以新買畓秋收及文記于本堂

7월에 사빈서원 별소의 유사 김태운이 새로 사들인 논에서 추수한 것과 문기를 함께 본 서당에 납입하였다.

 

◦ 『己丑移建時日記, 泗濱書院

影堂處地偪窄齋室隘陋士林之間久有移建之議而以時屈擧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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