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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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호계서원 |
명칭 | 『虎溪書院講錄』 |
문화재 지정 표기 | |
작성주체 | 虎溪書院 |
작성지역 | - |
형태사항 | 크기: 장정: 수량: 재질: 표기문자: |
◦ 『虎溪書院講錄』, 1856, 廬江書院, 호계서원 강회 내용 수록
[1856년/05월/일미상] 丙辰五月
巡相申公錫愚憂學政廢。施行關列▩(邑)。令選士講學。地主趙侯在應依營關帖。諭本院。
병신년 5월에 순찰사 신석우가 학정學政이 폐이廢弛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읍에 공문을 내려서 선비들을 뽑아 강학하도록 하니 지주 조재응이 영문의 관첩에 따라서 본 서원에 알려왔다.
[1856년/08월/일미상] 八月
營關再到。鄕中老成會于本院。薦出訓長前參奉柳致皜。直月幼學權璉夏。金弘洛。柳參奉呈單三辭。地主貽書敦勉。旋値儒林多事。不改設行。巡相又貽書道內知名之士。要會講于營下樂育齋。諸人辭不敢進。
8월에 영문의 관문이 재차 내려오자 향중의 노성老成이 본 서원에 모여서 훈장에 전참봉 류치호, 직월에 유학 권연하와 김홍락을 추천하여 선출했는데 류참봉은 세 번이나 수행할 수 없다는 글을 올려 보내왔다. 지주가 독실하게 애써서 시행하도록 글을 보내 왔는데 유림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구실로 명을 고쳐 시행하지 않자 순찰사가 또 도내의 저명한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영하의 낙육재에서 모여 강회를 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은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856년/09월/일미상] 九月
營諭邑飭。申複不已。
9월에 관영에서는 각 영읍에 같은 명령을 계속 내려 보냈다.
[1856년/10월/15일] 十月望日
大坪丈席前參判柳致明與鄕中諸人。會議于臨川書院。發文鄕內。以十一月初十日定講會。還訓長辭單。訓長以瘇患又呈單。齋有司李文稷。朴馨壽先期入院。與講儒諸人。稟于丈席。薦出本院洞主。進士金健壽爲訓長。洞主又呈單三辭。會中起送儒生。請洞主出膺。
10월 15일에 대평의 장석 전 참판 류치명과 향중의 여러 사람이 임천서원에 모여서 의논을 하고는 향내에 통문을 보내어 11월 10일을 강회 날짜로 잡고 훈장의 사의의 뜻이 담긴 정단을 되돌려 보내었으나 훈장은 병 때문에 또 사의의 뜻이 담긴 정단을 보내왔다.
재의 유사 이문직과 박형수가 약속한 날보다 먼저 서원에 와서 강론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본 서원의 원장인 진사 김건수를 훈장으로 추천해서 뽑았다고 선생께 아뢰었다. 원장이 또 세 번이나 사양의 뜻을 표시하자 모인 사람들 중에 유생을 보내어 원장이 응해줄 것을 청했다.
[1856년/11월/14일] (十一月)十四日
洞主入院。
14일에 원장이 서원에 들어오고
[1856년/11월/15일] (十一月)十五日
行香禮。開座于崇敎堂。選士三十人。薦出執禮前正字李敦禹。司儀幼學柳致儼。直月權璉夏。遭服呈單。遞代出幼學權定夏。直日李祺稷。金鎭慤。講錄有司柳致淑。金毅壽。柳胥鎬。金道和。金斗永。權世淵。把定執事訖。諸生請行庭揖禮。洞主固辭曰。吾猥忝洞主。不敢不參會。然主席則何敢自居乎。但列坐通讀。可也。諸生曰。洞主受庭揖。自是已例設講之初。不可闕。此儀强之。不已。行庭揖禮訖。司儀以諸生意。上書于丈席曰。訓長旣辭不出。洞▩(主)又不敢當。士心解施。莫可振作。咸願奉邀函席。倡率其始然後。門下老成承其旨敎。以諭諸生。則庶可以嗅醒人心。而嚴不敢請云云。丈席答書許之。
15일에 향례를 행하고 숭교당에 앉아서 뽑은 선비 30명이 집례에 전정자 이돈우, 사의에 유학 류치엄, 직월에 권연하(상을 당한 중이어서 사양하므로 유학 권정하를 대신 뽑음) 직월에 이기직과 김진각, 강록유사에 류치숙ㆍ김의수ㆍ류서호ㆍ김도화ㆍ김두영ㆍ권세연 등으로 천거하여 뽑았다.
집사를 모두 뽑고는 여러 사람들이 정읍례를 청하자 원장은 한사코 사양하면서 “내가 외람되게도 원장으로서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주석은 내가 감히 어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다만 둘러앉아서 통독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생들이 “원장께서 정읍을 받는 것은 전례입니다. 강론을 열 때 이런 의식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강하게 권하는 것이 계속 되어 정읍례를 마치고 사의는 여러 사람의 뜻으로 선생에게 글을 올리면서 “훈장께서 사양하셔서 나오지 않으시고, 원장께서도 당도하지 않으시니 저희들의 마음이 가라앉아서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한결같이 선생님을 모시고 그 시작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그런 다음에 문하의 노성이 그 뜻을 받아서 제생들에게 일러주면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울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청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운운했다. 이에 장석께서 서면으로 허락하시었다.
[1856년/11월/16일] (十一月十六日)翼日
携柳參奉到院。諸生莫不聳然興起。
다음날 류참봉을 데리고 서원에 도착하니 제생들이 기뻐서 일어서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856년/11월/17일] (十一月)十七日
丈席及訓長率諸生謁廟。設席于堂中。請丈席升座。丈席曰。吾以耄年有此强動。只欲勸起兩君。以勵後生。而吾則不妨爲聽說之初乎。於是丈席坐于主敬齋。大文義則今諸生譯而聽之。以折其卞詰。兩訓長席于崇敎堂。執禮司儀以下以次列坐。諸生更進迭讀。講心經首卷。逐日早行庭揖禮。丈席立于堂上兩楹間。訓長及洞主侍立左右。執禮於阼階上西向。唱笏記。讀白鹿洞規。諸生於庭下。分東西班序立。行揖禮訖。設講席。遂終日。凡五日而畢。以院力凋弊。無以支多士累日之供也。將罷。洞主諗于象曰。今玆之會。實年來所未有之盛擧也。大老臨止。鄕秀畢集。盍因此行鄕飮酒禮。而今多士觀瞻。以彰 聖代化民成俗之敎。答賢方伯尙禮興學之意乎。僉曰諾。翼朝行禮。晡時禮畢。主人進士金健壽。賓前參奉柳致皜。介正字李敦禹。僎前參判柳致明年八十。賓長李海鷹。裴翰周。金祚運年皆七十餘。贊柳致儼。司正金弘洛。讀約金驪洛。是日會者二百餘人。
17일에 장석과 훈장께서 제생을 인솔하여 묘에 알현하고 당중에 자리를 마련하여 제생이 장석께 올라가서 앉으시라고 청하니 장석이 “나는 팔십의 나이인데 이렇게 억지로 움직이게 되었으니 다만 저 두 사람에게 권해서 후생들을 권면하게 하는 것이지, 나는 이야기나 듣는 황초평이 되어도 괜찮소.”라고 하였다. 이에 장석은 주경재에 앉고 대문의 뜻은 제생에게 번역하게 하여 듣고 질문에 절충하였으며, 두 훈장은 숭교당에 자리 잡고 집례와 사의 이하는 늘어앉으니 제생이 다시 나아가서 『심경』1권을 강독하였다.
날마다 아침에 정읍례를 행하고 장석께서 당상의 양 기둥 사이에 앉고, 훈장과 원장은 장석의 양 옆에서 모시고 앉고, 집례는 동쪽 계단위에서 서쪽을 향하여서 홀기를 창하고 백록동규를 읽으며, 제생은 정하에 동서로 나누어 양쪽으로 차례대로 서서 읍례를 마치고 강론하는 자리를 개설하였다. 종일토록해서 5일만에 끝냈는데 서원의 형편이 조락하고 피폐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며칠 동안에 제공되는 비용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강론을 끝낼 때 원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의 이 모임은 참으로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성대한 행사입니다. 대노께서 찾아와 주시고 고을의 수재가 모두 모여서 이로 인하여 향음주례를 행하여 지금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아서 성대의 화민성속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현명한 관찰사의 예를 숭상하고 학문을 흥하게 하려는 뜻에 보답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예를 행하여 새벽례를 마쳤다. 주인은 진사 김건수, 빈은 전참봉 류치호, 개介는 정자 이돈우, 준僎은 전참판 류치명인데 나이가 팔십이고, 빈장賓長은 이해응ㆍ배한주ㆍ김조운 등인데 모두 70여살이며, 찬贊은 류치엄, 사정司正은 김홍락, 독약讀約은 김여락이었으며, 이날 모인 사람은 이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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