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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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역동서원 |
명칭 | 『大山集』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李象靖 |
소장정보 |
◦ 『大山集』, 李象靖, 권28, 書, 「與李日昇 鎭東○辛丑」
秋事且盡。薄寒中人。遠惟棣牀靜頤。履用毖相。象靖一病支離。尙欠蘇健。家裏憂虞多端。日事惱撓。况味無足言者。所有職名。幸蒙恩遞。得與山氓野老。隨分飮啄。感戴天日。死亦無所恨矣。易東追享之議。自是先輩已定之論。而百年響寢之餘。幸復重發。事若有不偶然者。而畢竟又復蹭蹬。天下事苦難得如意。然近聞又有一段議論。謂不合追享於易東。傳播遠邇。間亦有和之者。是則非區區意慮之所及也。大抵此論始發於柳拙齋。而李開谷金風雷諸公。皆聯名發書。李觀瀾,裴楡巖諸公。又發諸言議歌詠之間。斯固一路之公誦。京鄕之通議。特緣事故。尙爾遷就。實斯文之缺典。而今乃忽有此異論。非所望於僉君子也。張子曰。孟子善用易。邵子亦曰孟子得易之用。今七篇之書。曷嘗有一易字而猶云云者。以孟子之言行運用。得乎大易吉凶消長之道。進退存亡之義。是乃所謂善易者不言易。而非如揚雄之太玄。王通之中說。徒擬議其粗迹也。金先生聞禮家庭。私淑陶山。沈潛經籍。硏究體驗。其問學之功。淵源之漸。可按覆於狀碣挽誄諸作。而至其出處之正。樹立之卓。有以棟樑乎宇宙。砥柱乎頹波。則實與古者伯夷子陵之倫。異世而同歸矣。易乾之文言曰。遯世无悶。不見是而无悶。確乎其不可拔。否之。象曰。儉德辟難。不可榮以祿。困之象曰。致命遂志。大過之象曰。獨立不懼。禹先生之持斧彤庭。視死如歸。卽其有得於易之道者。而金先生之蹈義成仁。至死不變。殆殊塗而一致。孰謂先生之不閑於易乎。儘如其說。則太玄中說。可擬於易。而孟子爲不善於用易也。一時悠悠之論。初無加損於先生之本分。而輾轉流播。以自陷於輕議前輩之科。則亦非小故也。病中聞此。仰屋竊歎。敢私布于座下。未知盛意以爲如何。
가을이 다하고 약간의 추위가 느껴지는데, 멀리서 생각건대 형제간에 조용히 수행하는 일상이 평안하리라 여겨집니다. 나는 병이 계속해서 낫지 않아 아직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많아 날마다 마음만 졸이고 있으니, 지금 상황에선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니고 있던 직명은 다행히도 체직의 은명을 받아 시골의 평범한 노인이 되어 분수에 맞게 생활하고 있으니, 하늘의 해와 같은 성상의 은혜에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추향 논의는 본래 선배들이 이미 정해 놓은 의견이며, 백 년간 잠잠했다가 다행히 다시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지만 결국 일이 또 어긋났으니 세상의 일이 참으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들으니 또 일단의 논의가 있어 역동서원에 추향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원근에 전파하고 간혹 여기에 호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이는 내가 염려한들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대체로 살펴보면, 이 논의는 처음 유졸재(柳拙齋)에게서 발의되었는데 이개곡(李開谷)과 김풍뢰(金風雷) 등 제공이 모두 연명으로 서신을 띄웠으며, 이관란(李觀瀾)과 배유암(裵楡巖) 등 제공은 또 논의와 시문에 드러내었으니, 이는 참으로 한 고장의 공론이며 경향 각지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다만 사정이 있어 아직까지 미뤄지고 있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에 흠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득 이러한 이견이 있으니, 이는 여러 군자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맹자는 역(易)을 잘 사용하였다.”라고 하였고, 소자(邵子)도 말하기를 “맹자는 역의 용(用)을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7편(篇)의 글에 어찌 역(易)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맹자의 언행과 운용이 《주역》의 길흉 소장(吉凶消長)의 도와 진퇴 존망(進退存亡)의 의리에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을 잘 아는 사람은 역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이나 왕통(王通)의 《중설(中說)》처럼 대강의 흔적만 논한 것이 아닙니다.
김 선생(金先生)은 집안에서 예학을 배웠고 도산(陶山)을 사숙(私淑)하여, 경서에 깊이 마음을 두어 연구하고 체험하였는데, 그 학문의 성과와 이어진 연원은 행장, 묘갈, 만시, 뇌문(誄文) 등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출처(出處)와 우뚝한 지조는 우주를 지탱할 수 있고 거센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실로 그 옛날의 백이(伯夷)와 자릉(子陵) 등에 견주어 볼 때에 시대는 다르지만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세상에 은둔하되 근심하지 않으며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여도 근심하지 않아, 확고한 뜻을 뽑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비괘(否卦) 상(象)〉에 “덕(德)을 검약(儉約)하여 난을 피하여 복록으로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곤괘(困卦) 상〉에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룬다.”라고 하였고, 〈대과괘(大過卦) 상〉에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우 선생(禹先生)이 도끼를 지니고 대궐에 나아간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니 역의 도를 얻은 것이고, 김 선생이 의리를 지키며 인을 이루었고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은 것은 길은 다르지만 거의 똑같은 것이니, 누가 선생을 두고 역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참으로 그 말과 같다면 《태현경》과 《중설》은 역에 비견될 수 있고, 맹자는 역을 잘 사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때의 아득한 논의는 애초 선생의 본모습에 아무런 해가 없지만 계속해서 유포되어 선배를 가볍게 평가하는 잘못에 절로 빠지게 되면 이 역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병중에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개탄스러워, 감히 그대에게 사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