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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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임천서원 |
명칭 | 『臨川書堂重建日記』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임천서원 |
소장정보 |
◦ 『臨川書堂重建日記』, 미상, 임천서당 중건 일기
[1803년/03월/24일] 嘉慶八年癸亥三月二十四日
自臨北龜溪書院會中。發臨川書堂重建之論。夫是論也。默洞李重祖同水谷柳上舍廷燁首倡焉。其略曰。府東臨河縣大川上。古有書堂。扁其堂曰臨川。名其樓曰峨洋。中間爲鶴峯先生腏享之所。俄擧廬江書院配食之禮。移奉位版後。其材瓦田土臧獲屬之。泗濱影堂殆至數百年之久。而其遺址列礎。宛然如昨。嗟呼。先師播馥之地。儒賢絃誦之場。一朝變爲農夫耕犁之土。牧童飯牛之谿。豈不爲後人之所可慨然也哉。蓋其形勝。藥山峙其南岐山昂於東。匡廬鏡浦在西北間。內而有三峯。孤山之伏藏其靈。上下有七灘。鯉淵之盤洄其流。又距白雲亭不過數●●許。無讓於岳陽之萬千。彷彿乎武夷之九曲。且其東江一帶。盡是當世堂員所居之鄕。名門右族蔚興。達人碩士輩出此。眞文明絶特之地。而荒廢多年。藏修無期。不但爲堂員子孫之所共歎慕。而行路指點者。亦莫不嗟惜肆。昔吾鄕先父老。每於要束會話之日。必曰。臨川書堂可重建云。而第非一里一門之所主者。又是天時地▩(理)之所係者。各家宂故互掣。各里弔慶不齊。屢成參差。有志未就者。積有年所矣。今於吾輩文會之日。盍謀所以重建此書堂。遵先父老之遺意乎。柳上舍樂應曰。善哉言乎。此吾輩大議論。因製通文數十行。列書會員五十人。直送于川前。川前長老招致泗濱院隷。卽爲輪傳于各面各里。覽是通文者。舊約子孫之外。亦皆願入。環在半鄕者。無不影從而響應。以斯速頓定爲期云爾。通文略曰。
임북 구계서원 모임 중에 임천서당을 중건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논의는 묵동 이중조가 수곡의 생원 류정엽과 함께 제일 먼저 주도하였다. 그 대략적 내용에, “안동부 동쪽 임하현 큰 냇가에 옛 서당이 있었으니, 그 집 편액을 임천서당이라 하고, 그 누각 이름을 아양루라 하였습니다. 중간에 학봉선생을 제사 드리는 장소로 삼았는데, 얼마 뒤 여강서원에서 선생을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위판을 그 곳으로 옮겨 모신 뒤, 재목과 기와 토지 노비 등을 사빈영당으로 소속시켰습니다. 이제 거의 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그 터가 남아 있고 주춧돌이 배열되어, 완연히 마치 어제 일인 듯합니다. 아하, 선사先師께서 학문을 전파하던 땅이요, 선비들이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던 터전이 하루아침에 농부가 밭가는 농토와 목동이 소먹이는 골짜기로 변하였으니, 이 어찌 후세 사람들이 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그 좋은 경관을 보자면, 남쪽에는 약산이 우뚝하고, 동쪽에는 기산이 높이 솟아 있으며, 광려와 경포가 서북쪽 사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삼봉과 고산이 그 신령함을 감추고 있고, 위 아래로 칠탄과 이연의 휘감아 도는 물길이 있으며, 또 백운정에서 거리가 불과 몇 리 되지 않아서, 악양루의 기상에 조금도 못지않고 무이구곡가 엇비슷합니다. 또 그 강 동쪽 일대는 모두 당시의 당원들께서 거주하던 고을로, 명문 우족右族이 성대하고 일어나고, 현달한 인물과 큰선비가 배출되었으니, 이곳은 참으로 문명이 탁월한 지역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하게 버려진 지 여러 해가 되어 묻혀 공부하기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당원 자손들이 다 함께 개탄하고 흠모할 뿐만 아니라, 길을 가며 가리키는 사람들 또한 탄식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날 우리 고을의 선대 어른들께서 매번 안동에 모여 이야기할 때마다 반드시 임천서당을 중건해야 한다고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한 가문에서 주관할 것이 아니고, 또 하늘의 시운과 땅의 운세가 관계되는 것인지라, 각 집안의 잡다한 일에 서로 얽매이고, 각 마을의 경조사가 이리저리 얽혀, 여러 차례 차질이 생겨 뜻을 가지고도 성취하지 못한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문회文會를 하는 이날, 어찌 이 서당을 중건하여 선대 어른들께서 남긴 뜻을 따를 방법을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생원 류정엽이 즐겁게 응답하여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말씀이여. 이는 우리들의 중대한 의논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십 행을 짓고 회원 50명이 차례로 서명을 하여 바로 천전川前으로 보냈더니, 천전의 장로長老가 사빈서원 소속 종들을 불러 즉시 각 면 각 마을에 돌려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 통문을 본 사람들은 옛날에 맹약했던 집안 자손들 외에도 다들 가입하기를 원했고, 반향半鄕 주위에 사는 사람들도 그림자처럼 따라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 일을 빨리 단번에 결정하기를 기대한다고들 하였다. 통문에 대략 이렇게 말하였다.
[1803년/04월/26일] 四月二十六日
因泗濱文會。議定書堂重建事。仍把任。都都監。水谷柳上舍廷燁。默洞李重祖。川前金啓運。成造都監。法興李宜秀。梧臺金明運。輞川金纘運。臨河權相基。川前金斗運。收錢伐木。以其各面各里知事勤幹之人。出送有司。于回文中。星州茶山李奎運。以遊觀之行。適參此會。仍自艶歎不已。
사빈서원의 문회를 계기로 임천서당 중건의 일을 의논해서 확정하고, 곧 이어 임원을 정하였다. 도도감은 수곡 생원 류정엽ㆍ묵동 이중조ㆍ천전 김계운이고, 성조도감은 법흥 이의수ㆍ오대 김명운ㆍ망천 김찬운ㆍ임하 권상기ㆍ천전 김두운이며, 돈을 거두고 재목을 벌목하는 일은 각 면 각 마을에서 일을 알고 부지런하며 능력 있는 사람을 유사로 선출해서 회문가운데 적어 보내기로 하였다. 성주군 다산의 이규운이 유람 행차로 왔다가 마침 이 모임에 참석하여 거듭 아름다운 일이라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1803년/04월/27일] (四月)二十七日
●(泗)●(院)會員罷歸。李奎運從諸長老。直向臨川舊址。彷徨半餉。顧謂諸長老曰。美哉。山峨峨水洋洋。眞名勝之地。僉尊重建書堂之意。不亦善乎。吾南勝地何限。而此則吾所創見者。若成書堂于此地。則書吾名字於堂案末。仍又留連于川上。以書堂隨行之意。依收錢例。置十文錢于都所而去。此亦勝事也。
사빈서원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 마치고 돌아갔다. 이규운은 여러 장로들을 따라 바로 임천서당 옛 터로 갔다. 한 동안 서성거리다가 여러 장로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아름답습니다. 산은 높디 높고 물은 넓디넓으니, 참으로 명승지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서당을 중건하시려는 뜻이 또한 훌륭하지 않습니까? 우리 영남에 명승지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만, 이런 곳은 제가 처음 보겠습니다. 만약 이 곳에 서당이 완성되면 서당 유안儒案의 끝에 제 이름자도 적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대로 또한 천상川上에 머물다가 서당 중건 일에 함께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돈 거두기로 한 예규에 따라, 돈 10문을 도소에 놓고 갔으니, 이 또한 훌륭한 일이다.
[1803년/05월/17일] 五月十七日
陶淵會中以臨川收錢失期事。飛文輪告于各處有司。
도연서원 문회 중에 임천서당 중건을 위해 거두기로 한 돈의 납입 기한을 놓쳤다고 각 지역 유사들에게 급히 글을 보내 두루 알리도록 하였다.
[1803년/06월/09일] 六月九日
川上文會。各處少長。以臨川事。因便咸集。默洞都都監。行中其處。名帖及收錢竝來。午後美質法興兩里名錢又來。
천상의 문회 때 각 지역 젊은이와 어른들이 임천서당 일 때문에 되는대로 다 모였다. 묵동 도도감 이중조가 오면서 그 곳의 명단과 거둔 돈을 함께 가지고 왔다. 오후에 미질과 법흥 두 마을 명목의 돈이 또 왔다.
[1803년/06월/10일] (六月)十日
雨。朝後縣洞名錢來。是日會于都都監所。別立規模。布置。增出。鳩材。伐木。燔瓦等有司分排。伐木處所及吐數。尺數。容入數。公私養松。無不抄錄。爲回文。輪傳于各里任員。又發呈 官。始事之議。製呈文儒生。進士李宗周。柳晦文。金養運。仍出呈文儒生十五員。日記有司二員。
비가 내렸다. 아침 식사 후 현동 마을 명목의 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