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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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화천서원 |
명칭 | 『謙菴集』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柳雲龍 |
소장정보 |
◦ 『謙菴集』, 柳雲龍, 年譜 권1, 「謙菴先生年譜」
正宗丙午九月。奉安位版于花川書院。院在河隈北岸上
◦ 『謙菴集』, 柳雲龍, 年譜 권2, 「花川書院奉安文[李守貞]」
恭惟先生。陶翁高弟。厓老金昆。淵源旣正。博約交敦。服膺亭扁。愈撝謙德。磨稜濟和。日見上達。蔚爲大儒。伯叔河南。學優而仕。奚試不堪。器效盤錯。治尙風節。鰲山之阜。有碑斯屹。課忠責孝。扶我民極。逮遭艱虞。暫守嶺阨。雪涕王事。排布周全。江山少使。賀正如前。天顔有喜。百僚動色。增秩改符。俾廣蘇澤。若保之餘。時務陳章。桑土遠戒。綢繆關防。睿眷曰篤。時望日赫。中書擬薦。進塗漸闢。先生不樂。就養田園。怡愉暇日。唱和篪塤。俯仰圖書。玩心淵天。蓋先生學。篤信師傳。依歸最先。親炙多年。門路端的。踐履精專。龍門楊謝。考亭李黃。斯文有託。沒世耿光。高山景行。疇不好懿。桐鄕有儼。矧伊畏壘。公議未伸。士心齊鬱。睠玆花川。杖屨餘躅。纓潭下流。屛岫莽蒼。於焉揭虔。曷不允臧。有侐新宮。生色川原。牲酒是將。衿佩駿奔。洋洋降右。顧我羣蒙。其始自今。報祀無窮。
삼가 생각하오니 선생은 퇴도(退陶)의 높은 제자요, 서애(西厓)의 어진 형님이다.
연원이 이미 밝으니 박약(博約)이 서로 돈독하였더라. 가르침을 잊지 아니하고 정자의 편명을 얻었음은 더욱 위겸(僞謙)의 덕이라.
모난 것을 갈고 화온한 대로 나아가니 날로 학문이 발달함을 보였더라. 울연(蔚然)히 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이름난 유학자가 되니 하남 땅의 백숙(伯菽)과 같더라. 학문이 높아 벼슬길에 오르니 무엇을 맡겨 시험한들 감당 못할까? 기량은 얽히어 뒤섞임을 가려낼 수 있고 치정(治政)은 풍절을 숭상하였도다.
저 오산(鰲山) 언덕에 지주비(砥柱碑)가 홀연하게 세워졌고 백성들에게 충의를 권장하는 효제를 의무 지워 오륜과 삼강을 고취시켰다. 임진년에 난리를 만나자 영남의 산읍인 풍기고을 수령을 잠시 맡았으나 나라의 원수를 설욕하기 위해 세밀히 일을 계획하였다.
강산이 수천 리를 격했건만 해가 바뀌자 새해 첫날에 파견한 하정사(賀正使)가 무사히 의주까지 이르니 임금이 기쁜 기색을 띠었고, 신하들도 놀라 얼굴빛이 변했도다. 벼슬 품수가 더해지고 위계가 높아지자 그 은혜를 더 넓혀 갓난아이 돌보듯 백성들을 살폈다.
당시에 시무가 급함을 소장을 올려 진달하였는데 상토주부(桑土綢繆)의 원계(遠戒)를 세워 조령(鳥嶺)의 관문 방어를 굳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임금이 보시고 가상하다 하였고, 조정에서도 승지로 기용하려는 여론이 일어났다.
벼슬길은 점차 열렸으나 선생은 이를 즐기지 않고 어머니 곁에서 효양하고자 전원으로 돌아왔도다. 마음도 편안하고 한가로운 가일에는 형제분이 화목하게 창화(唱和)하고 도서의 정연에 침잠하기도 하며 때로는 마음을 비워 천지자연의 법칙을 관조하여 살피기도 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사부인 퇴계 선생을 독실하게 믿는 데서 나왔다. 선생에게 가장 먼저 의귀(依歸)하였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햇수가 오래되어 공부가 적실(的實)하고 실천함이 정밀하였으며, 정문(程門)의 양구산(楊龜山)과 사상채(謝上蔡)와 같아서 사문은 의탁할 곳이 있었고 세상을 떠나서도 그 유광은 빛났도다.
높은 행실을 고산처럼 우러러 보았으니 누구나 그 의행을 흠모하지 않았으랴? 사당도 이미 엄숙히 세워졌는데 하물며 이제 더 지연케 되면 미안하고 두렵기도 할 뿐 아니라 공의(公議)를 펴지 못하니 사림들의 마음도 모두 답답해합니다.
돌아보건대 이 화천은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 탁영당의 하류로 진실로 착하시지 않고서야 이루어졌으랴. 정적한 신궁(新宮)이 세워 있으니 저 천원(川原)도 경관의 빛을 더했도다. 생폐(牲幣)와 맑은 술로 향사를 드리려고 선비들이 사당에서 분주하도다.
양양하게 강림하시어 몽매한 우리 후생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지금부터는 길이길이 향사하리다.- 이수정(李守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