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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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 사빈서원 |
명칭 | 『大山集』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저 자 | 李象靖 |
소장정보 |
◦ 『大山集』, 李象靖, 권12, 書
「與金退甫 壬申」
得與周旋於泗水之濱。款承講誨之益。此十數年來所願欲而未得者。歸來盎然而飽。又恨以事牽不能卒其嘉惠也。別後秋盡。薄寒已中人矣。
더불어 사수(泗水)의 물가[사빈서원]에서 주선하면서 강회(講誨)의 유익함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십수 년 이래로 소원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던 일로서, 돌아올 적에는 속이 가득 찬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에 얽매여 그 아름다운 은혜를 다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도 했습니다. 이별한 뒤로 가을이 다 저물고 벌써 약간의 추위가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重答別紙」
…仰窺高明讀書。詳細精審。擬議稱停之一端。所以爲藥於粗疎汎忽略綽領會之病者。不啻對劑。敢不佩服。大抵高明見解與夫所引諸說。其於解仁之名義。蔑以復加矣。究得名義正當分明。則仁之爲義。眞切的當。固爲求仁之要。然終無柰此二句。在便是仁之下。於此識得仁體之上旣不能用高明之活法。則按文求義。只作此解說。亦未見其背於理而害夫仁。是以累蒙敎告之勤而不能飜然改悟。倘蒙始終提挈。使執迷之見。豁然有披雲睹天之期。則荷相與之義。寧有竆已邪。向與濯以論此於臨河會席。亦未竟而罷。尙用耿耿。早晩語次。或可關及。使一段議論。有究竟之日。區區所望幸於直諒多聞之益也。…
…대개 고명의 견해와 인용하신 여러 설은 인(仁)의 명의(名義)를 푸는 데 있어서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명의를 궁구한 것이 정당하고 명백하니, 인의 뜻이 진절(眞切)하고 적당(的當)하여 진실로 인을 구하는 요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곧 인이다.〔便是仁〕’의 아래, ‘여기에서 인체를 알 수 있다.〔於此識得仁體〕’의 위에 놓은 것은 끝내 어찌할 수 없어서, 이미 고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활법(活法)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문장 자체에 의거해 뜻을 구하여 단지 그처럼 풀이하였던 것이니, 또한 이치에 어긋나서 인(仁)을 해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여러 차례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받고서도 쉽사리 개오(改悟)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시종일관 가르침을 주시어 미혹된 저의 견해가 구름이 걷혀서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원스럽게 뚫릴 기약이 있게 해 주신다면, 함께해 주는 의리〔相與之義〕에 감사하는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탁이(濯以)와 더불어 임하(臨河)의 회석(會席)에서 이에 대해 논하였는데, 또한 끝을 보지 못하고 파하였기에 아직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만간 토론하는 자리에서 혹여 이 문제를 언급하여 일단의 의론이 끝을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된다면, 이는 구구한 제가 직량다문(直諒多聞)한 벗들에게 소망하는 바일 것입니다.…
「答崔公普」
日前泗濱設文會。與金退甫諸人。周旋四五日。所得皆文句講討之末。未能深有所益。然觀感麗澤之際。所警於昏惰者甚多。恨不與明者共此樂也。
일전에 사빈서원(泗濱書院)에서 문회(文會)를 베풀어 김퇴보(金退甫) 등 여러 사람과 4, 5일 동안 교유하였는데, 소득이 모두 말단적인 문구와 강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심히 유익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고 느끼며 학문을 강습하는 즈음에 혼매하고 나태한 나에게 경계됨이 매우 많았으니, 그대와 이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 『大山集』, 李象靖, 권46, 祭文, 「祭李公燮文」
嗚呼。世益衰。聲利溺人。此等人物。此等議論。今何處得來也。公與霽翁父子。結爲道義。交相期於歲晏。而旣次第淪謝。公輒有郢斤喪質之歎。俯逮不肖。辱置收憐之末。泗水春風。湖村夜雨。語出入古今。娓娓以進學自勵。
아아, 세상이 더욱 쇠하여 사람들이 명성과 이익에 빠져 있으니, 이런 인물과 이런 의론을 이제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공이 제옹(霽翁) 부자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어 서로 모년(暮年)의 상대로 기약하였더니 얼마 뒤에 이분들이 차례로 돌아가시자 공은 학문을 토론하며 자신을 알아줄 상대가 없어졌음을 탄식하였다. 이에 불초한 나까지 욕되게도 말석에 거두어 주시어 봄바람 일던 사수(泗水)와 비오는 밤 소호촌(蘇湖村)에서 함께 고금을 넘나들며 얘기를 나누었는데, 부지런히 학문에 진보하기를 스스로 힘쓰고 후배들을 수습해 주도록 나를 면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