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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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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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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호계서원
명칭 『響山集』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李晩燾
소장정보

상세정보

◦ 『響山集, 李晩燾, 5, , 答崔純夫 正愚辛丑

肅仲近節若何向答一書而未知不浮沉也

壬子儒䟽批有念念闡揮之語而實親題御筆也不可藏於私室故安于安東校宮疏事及前後日記在三溪虎溪鶴林權公 訪 以其時疏儒折衷兩院所藏文字名之曰闡揮錄錄旣成俛菴卧隱諸先輩會校於西岳以出正本故再昨年豐山之會聞在泮嶺儒已上疏蒙批而典禮已至擇日矣開座之席僉曰壬子聖敎當更奉審闡揮錄收拾是爲急務也今春始自三溪依前論定會于花府奉審聖敎欲開板闡錄而元錄外乙卯己亥新附之編亦似如計而渾成一文字矣旣有詳示之敎故玆以縷縷。…

숙중(肅仲 최정기(崔正基))은 근래의 절도가 어떻습니까? 지난번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 답하였는데 제대로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자년(1792, 정조16) 유소(儒疏)에 대한 비답에 드러내 밝히기를 생각하고 생각한다.”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실로 정조께서 친히 쓴 어필(御筆)인지라 개인의 집에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동(安東)의 교궁(校宮)에 안치하였습니다. 소장에 대한 일과 전후의 일기가 삼계서원(三溪書院)과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있었는데 학림(鶴林) 권공 방(權公訪)이 그 당시 소장을 올리는 데 참여한 유생으로서 두 서원에 보관된 문자를 절충해서 천휘록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천휘록이 이루어지자 면암(俛庵)과 와은(臥隱)을 비롯한 선배들이 서악(西岳)에 모여 교정해서 정본(正本)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작년 풍산(豐山)의 모임에서 성균관에 있는 영남의 유생이 소장을 올려 비답을 받아서 전례(典禮)를 행할 날짜를 가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좌(開座)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자년(1792) 성상의 하교는 다시 살펴야 하니, 천휘록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비로소 삼계서원에서 이전에 논정(論定)한 대로 화부(花府 안동)에 모여 성상의 하교를 살펴서 천휘록을 출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기록 이외에 을묘년(1795)과 기해년(1839, 헌종5)에 새로 첨부한 글이 또한 계획대로 하나의 문자를 자연스럽게 이룬 듯하였습니다. 상세한 내용을 알려 달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 『響山集, 李晩燾, 14, 墓碣銘, 南栖柳公墓碣銘 幷序

先是所菴李公秉遠就廬江設講居齋公與其選稱異等。…

이보다 앞서 소암(所菴) 이공 병원(李公秉遠)이 여강(廬江)에 나아가 강의를 하고 거재(居齋)하였는데, 공은 그 선발에 뽑혔고 남다르다는 칭찬을 받았다.

 

◦ 『響山集, 李晩燾, 18, 行狀, 叔祖梅竹軒公家狀

임천서당(臨川書堂)이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부터 다시 종향(從享)한 뒤로 유물(儒物)이 없었고, 규약을 변경할 때에도 일찍이 의견이 분분하였다. 영남 유림들이 네 선생의 배향을 합청(合請)하고자 하여 소수(疏首)의 망기(望記)가 부군에게로 돌아오자, 곧바로 자질들에게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빠져 나오게 하였으니, 아마도 임자년(1792, 정조16) 이후로 유생들이 요란했던 것을 경계하여 그리하셨던가 보다.

 

◦ 『響山集, 李晩燾, 別集6, 行狀, 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朴公行狀

高祖諱文起早歿夫人權氏當虎溪書院刱設鄕人請貨其居地夫人以諺書答之曰儒賢廟食之所何可貨之未亡人亦有子孫願以爲托。…

고조부 휘 문기(文起)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이분의 부인 권씨(權氏),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창설할 때 동네 사람들이 부인이 살고 있는 땅을 팔기를 청하자, 언문 편지로 답하면서 유현(儒賢)이 제향을 받으시는 장소인데 어찌 팔 수가 있겠습니까. 미망인인 저에게도 자손이 있으니, 그들에게 의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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