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_META_TITLE_ 휴관일입니다.


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용계서원 > 문집

기본정보

좌우로 스크롤하시면 전체 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용계서원
명칭 『향산집(響山集)』, 권10, 기, 「용계서당기(龍溪書堂記)」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이만도(李晩燾)
소장정보

상세정보

『響山集』, 李晩燾, 卷之十, 記, 「龍溪書堂記」

 

永陽之龍溪書堂。卽龍溪書院之一變者也。昔在端廟遜位之時。李耕隱先生棄官歸臥於一善之網障村。自託聾盲。不與人接曰我且修養也。月朔向日再拜曰我且祈禳也。其心微其迹隱。與趙漁溪,元觀瀾,金梅月,成文斗,南秋江。世稱生六臣。善之月巖書院咸安之西山書院。皆載祀典。惟永陽乃先生子孫之鄕。始立先生別廟。後幷奉五先生陞而爲院。時則英祖盛際也。雖未蒙額。盖嘗建請于朝。其承聖化而育人材。卽與上二院無以異也。不幸鞠爲茂草。于今三四十年也。後孫光魯源,承源諸人。就舊址西水上數里紫陽山下鶴眠亭墟。更構是堂。鶴眠卽先生玄孫某之素所粧點。而今一擧而兩伸其情矣。堂旣成。遣泰一遠來請記於余。其誠勤矣。其志苦矣。昊天其復乎不復乎。試以已事之顯晦言之。方先生之隱約窮閻三十年。非佔畢齋雖妻子亦莫知其心也。三十年而得遇佔畢齋非天乎。光廟以後二百年之間。忌諱益嚴。非我明陵之仁聖。孰察伯夷非武王之心而表章之無有餘憾乎。二百年而得遇明陵之世亦天也。已事旣然。况向時一番指揮。卽敎化之所以抑揚也。使居是堂者。實有所學。實有所事。無敢遊衍。則積誠所格。堂之陞而爲院。安知不如昔時之盛乎。惟其實用工夫之道。不待他求也。先生詩曰精微十六字。的的在胸臆。輔以五車書。博約見天則。夫十六字。乃堯舜禹相授之心法。博文約禮。又孔孟以後相傳之旨訣也。先生旣擧此爲訓。則其忠義大節。皆從學問中來可知也。願諸公奉此詩敎。以爲家計。朝夕孜孜。則紹庭上下。其必曰余有後。而况天惟顯思。日鑒在玆者乎。於乎。龍溪與臨臯鄭文忠院相距幾里。磊磊軒天地之忠義。上下對幷。而吾祖文純公所付性理羣書於臨臯者。至今尙存否。其精微博約之義。又詳見羣書之中。諸公必知之矣。

 

『향산집』, 이만도, 권10, 기, 「용계서당기」

 

영양(永陽 영천의 고호)의 용계서당(龍溪書堂)은 곧 예전의 용계서원(龍溪書院)이 일변한 것이다. 옛날 단종께서 손위(遜位)하실 때에 경은(耕隱) 이 선생(李先生)께서 관직을 버리고 일선(一善)의 망장촌(網障村)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귀머거리와 장님으로 자처하여 외부인들을 일절 만나지 않고 “나는 수양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매월 초하루가 되면 해를 향해 두 번 절을 올리고 “나는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은 은미하고 그 자취는 은밀하였다. 어계(漁溪) 조려(趙旅), 관란(觀瀾) 원호(元昊),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세상에서 생육신으로 일컬어졌다.

선산(善山)의 월암서원(月巖書院),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은 모두 사전(祀典)에 등재되었다. 영양의 용계서원은 경은 선생의 자손들이 사는 고장으로, 처음에는 선생을 모시는 별묘(別廟)만을 세웠다가 뒤에 다섯 선생을 함께 봉안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는 영조의 태평성세였으니, 비록 사액의 영광을 입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조정에 청을 올려 성상의 교화를 받들고 인재를 육성하는 역할만은 앞에 말한 두 서원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3, 4십 년이나 방치되어 풀이 무성하게 우거졌다.

후손 이광(李光), 이노원(李魯源), 이승원(李承源) 등 여러 사람이 용계서원 옛터의 서쪽 냇가에서 몇 리 떨어진 자양산(紫陽山) 아래 학면정(鶴眠亭)이 있던 자리에 다시 이 서당을 건립하였다. 학면정은 곧 선생의 현손 아무개가 오래전부터 가꾸어 오던 곳이었으니, 지금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서당이 낙성되고 난 뒤 이태일(李泰一)을 보내어, 멀리 나에게 와서 기문을 청하였다. 그 정성이 근실하고 그 뜻이 간절하니 하늘이 다시 서원으로 복원해 주실 것인가, 아니면 복원해 주시지 않을 것인가? 지난 역사의 자취를 가지고 한번 말해 보자면 바야흐로 경은 선생이 빈궁한 여항에서 30년 동안 은거하실 때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를 제외하고는 비록 처자식이라 할지라도 선생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30년이 지나 점필재가 알아주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광묘(光廟 세조) 이후 200년 세월 동안 관련 사실을 일체 엄히 숨겨 왔으니, 우리 명릉(明陵 숙종)의 어짊과 성명(聖明)함이 아니었다면 무왕(武王)에게 직언을 올린 백이(伯夷)의 마음을 누가 알아주어서 유감이 없도록 표창해 주었겠는가. 200년이 지나 명릉의 시대에 알아주었으니 이 역시 하늘의 뜻이다.

지난 역사가 이미 이러하고, 더구나 앞서 한번 내린 조령(朝令 서원철폐령)은 곧 교화의 억제와 부양에 관계된 바이다. 가령 이 서당에서 지내는 자가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실질적인 사업을 하여 감히 한만하게 놀지 않는다면 축적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킬 것이니, 그리된다면 서당이 승격되어 서원이 되는 것이 지난날의 성대함만 못하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 실용 공부의 방도는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선생의 시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유정(惟精) 유미(惟微) 십육 자가 / 精微十六字

또렷이 가슴에 새겨져 있거니와 / 的的在胸憶

다섯 수레 서책으로 보완하였고 / 輔以五車書

박약으로 하늘의 법칙 보았노라 / 博約見天則

16자(字)는 곧 요와 순과 우가 서로 전수해 주고 전수받은 심법(心法)이다. 박문약례(博文約禮)는 또 공자와 맹자 이후로 우리 유가에서 전수해 온 지결(旨訣)이다. 선생이 이미 이것을 가지고 교훈을 삼았고 보면 그 충의(忠義)와 대절(大節)이 모두 학문 가운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디 여러 공께서는 이 시에서 노래한 가르침을 받들어 자신이 공부하는 본령으로 삼아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라. 그렇게 한다면 경은 선생의 영령이 서당에 오르내리며 반드시 “나에게 훌륭한 자손이 있구나!” 할 것이다. 더구나 하늘이 밝디밝아서 날마다 이 세상을 살펴봄에랴.

아! 용계서당이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을 모신 임고서원(臨皐書院)과의 거리가 그 얼마나 되는가. 우뚝하게 천지에 드높은 충의가 아래위로 마주하여 함께 서 있다. 그리고 우리 선조 문순공 퇴계께서 임고서원에 보내 주신 《성리군서구해(性理群書句解)》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지? 유정 유미와 박문약례의 의미가 또 《성리군서구해》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여러 공께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미지

  • 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TOP
한국서원 제향인물 동아시아서원 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