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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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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도잠서원
명칭 『지산집(芝山集)』, 부록(附錄) 권3, 소(疏), 「도잠서원사액소(道岑書院賜額疏)」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정시간(鄭時衎)
소장정보

상세정보

◦ 『芝山集』, 曺好益, 附錄 第3卷, 疏, 道岑書院賜額疏, 肅宗 丁巳年 10月 [鄭時衎 等]

 

伏以臣聞。崇儒尙賢。有國之先務。而時代已遠。寵禮莫施。則又必尊其廟祀。致其㫌奬。以爲風厲表式之地。故在昔儒先之所過存。桑柘之鄕。杖屨之所。皆莫不俎豆尸祝。以寓景慕之意。而當我列聖右文之日。亦莫不賜額宣號。以擧褒顯之道。斯乃國朝儒化之盛。所以邁軼乎前古者也。乃若嶺南一方。則又是本朝之鄒魯伊洛。其間鴻儒碩學之特祀專享者。前後相望。渥恩殊褒。亦皆炳曜來許。而獨於臣等所居之鄕。有爲之廟宇而祀享。黌序而藏修者。至於六十餘年。而尙未蒙頒額之典。則斯豈不爲士林之所慨恨。聖世之一闕事也耶。臣等所居永川郡。卽嶺左下邑也。麗末。有文忠公鄭夢周出焉。倡明道學。實爲吾東方儒宗。而至我宣廟大王朝。又得一箇眞儒。故贈吏曹參判臣曺好益是其人也。臣等請爲殿下。先陳好益事行德業之梗槩焉。好益天資近道。穎悟絶倫。未及就傅之年。已知爲己之學。不藉師友之指導。而能自得於編簡之中。嘗從其表叔校理臣周博。求見皇極經世書,朱子大全。博亦一時名儒也。爲其年少而不與之。好益愈自發憤。刻志讀書。夜則懸髻警睡。晝則終篇乃食。稍長。遂負笈往遊于文純公李滉之門。益聞淵源之論。而所學大進。聲聞日彰。一道人士。莫不景仰而稱慕。宣廟丙子。大釐軍籍。故贊成臣崔滉。以御使董其事。欲取鄕邑之望。爲撿督之任。時好益居母憂將禫。而以仁順王后之喪在殯。不得行吉祭。猶持服在棘。滉初迫好益令視事。好益以制未終不起。滉疑其輕己。怒其違令。目以土豪。請罪于朝家。遂徙配關西之江東。江東去鄕邑千有餘里。道途絶遠。風隔土殊。人皆傷痛而憂危之。好益則怡然就道。獨無幾微見於色者。旣至配所。築室山中。惟以竆經講學爲事。深衣幅巾。端坐終日。左右經史。尤沉潛翫繹於洛閩遺書。饘粥屢絶。處之晏如。人有饋遺。必度義而辭受之。關西。羯羠近邊。不知有文學。及聞好益之風。遠近坌集。執經問學者。殆數十百人。好益各因其材而敎之。立學規以示門戶。行古禮以敎揖遜。自是人知嚮學。而蔚然有西河濟濟之美。關西數郡之士。至今知績文爲儒者。皆好益之功也。其後崔滉深自慙悔。累薦其賢於筵席。且請伏陷人之罪。躳詣好益而謝之曰。我陷君至此。常恐有天殃也。壬辰之變。大駕西狩。相臣柳成龍又薦其賢而訟其寃。遂赦拜義禁府都事。召詣行在。諭之曰。聞爾久在關西。人皆敬愛。可召募義旅。好益承命馳循。傍近列邑。募集丁壯。與柳成龍遇於林畔。語及王室。淚下如雨。成龍改容曰。草野忠誠如此。食祿王臣。反不如也。每於朔望。建牙布陣。西望痛哭四拜。衆皆感動流涕。嘗率兵往來。抄擊於中和,祥原之境。軍威日振。斬獲甚多。賊憚之。至爲假像。書其名而加刃焉。厥後。北踰永興。以躡淸正。南下梁山。以援天兵。其在軍中。寢不脫衣。竹笠皮襪。下同卒伍。柳成龍嘗稱之曰。曺好益儒生。不知兵事。而嘗以忠義。激勵士心。故士無不感服。而能得其死力也。宣廟。累加超擢。頻有恩賜。或別遣宣傳官而獎諭之。或特詢其所駐而授職。及其變亂旣定。好益亦遂解兵南還。雖連有州府之除。或就或不就。晩年。卜築于永川之芝山村。養靜自守。未嘗一出洞門。而惟矻矻讀書。不以已老而暫懈。臨歿之夕。猶憑几而坐。手取牀上書。凝翫良久。傍人視之。乃朱子大全也。尤邃於易禮。其剖析乎幽妙。折衷乎疑難者。具在於所著周易釋解,家禮考證等書。童子問答。實闡大學之旨。心經質疑。深明附註之義。其他書尺論著。無非發揮聖言。開示來學。其力行深造之功。眞知實得之效。誠有不可誣者矣。戊申。宣廟昇遐。好益詣郡舍。制衰絰成服。每遇朔望。向北哭盡哀。因山將迫。强起登道。及於啓欑之期。而齋素成疾。道路增瘁。竟至踰年而歿。蓋其高世之學。絶人之行。臨危殉國之忠。明道迪後之功。赫赫在人耳目者如此。當好益之在嶺南也。如先正臣文穆公鄭逑及文康公張顯光,文肅公鄭經世,文簡公鄭蘊諸人。或同經師門指授。或以道義相慕悅。麗澤之益。多見於竿尺。敬愛之實。屢形於篇章。而仁祖朝。嘗特贈好益亞銓之秩。此卽經世之所建請。以慰南土士子之望者也。求道之心。不懈於顚沛流離之中。好學之誠。無間於少壯老病之日。又能推所得於己。以及人而成就之。在西有丕變文風之效。歸南有振作多士之惠云者。卽蘊之所著銘於麗牲之石者也。故副提學臣李埈。又稱好益充養之厚。踐履之實。表裏無間。夷險如一。而門人故相臣文貞公金堉所著行狀。尤詳其事行終始。今皆可一一覆而見也。此亦足以知臣等所陳。非敢出於一毫私見私意者也。好益歿後。本郡儒士尊慕不忘。仍就平昔講學之所。創立祠宇。以奉俎豆。日月今已久矣。而本邑僻在荒陬。去國都甚遠。因循遷就。尙稽請額之擧。此則臣等之罪也。今者臣等。逖聞聖朝益勵文化。凡我本朝儒先之專祀鄕邑者。並宣恩額。曠典悉擧。臣等玆敢贏粮裹足。千里懷疏。不避猥越。仰扣宸聽。伏願聖明亟察好益學問之精深。事蹟之卓偉。俯諒多士景慕之深切。籲呼之懇至。特命禮官。宣賜院號。則斯文幸甚。士林幸甚。今或有言於臣等者。凡我士林爲儒先建置書院者。一人常享數處。如鄭文忠之祀崧陽。祀臨臯。祀忠烈。如李文純之祀陶山。祀廬江。祀鼎山者。蓋亦非一二。而近來朝家賜額。惟許一處。今者成川俎豆之所。已獲鶴翎之殊號。則南士之復爲此請。無乃近於疊徼恩命。而爲有司所格者乎。雖然。臣等竊伏而思之。鶴翎書院者。卽祖宗朝舊所賜額。爲士子藏修之地者。此本非爲好益特設者也。壬辰兵火之後。廢於灰燼。本土之人。因舊重新。與鄭逑並祀。則此又非好益專享之所也。當仁廟朝賜額之時。至命頒給四書二經。以敎訓儒士。此實出於特軫西土文化之未振。而亦不專爲好益崇報而發也。則尊賢尙德之典。豈可因此寢閣。不復施於當施之地哉。更願聖明俯賜睿察。明勅有司。斷然擧行。以爲士林光輝。尤不勝萬幸。臣等無任瞻天望聖激切祈懇之至。

批。省疏。具悉疏辭。當令該曹稟處焉。

禮曹回啓

觀此永川生員鄭時衎等疏辭。則本郡多士爲贈參判曺好益。建祠宇而俎豆之。今至六十餘年。願蒙宣額。有此陳請。曺好益天資穎悟。長益力學。非罪編配。曾無慍色。不鄙邊人。訓誨後進。大亂則募兵討賊。義聲動人。亂稍定則辭職還鄕。士望益歸。賢相薦其志節。聖主奬其精忠。則終始出處。可謂有道之士。而遺風餘韻。大爲一鄕士林之所景仰。祠宇香火。愈久而不廢。鶴翎從享。不專之爲歉。過百章甫封章來籲。特宣額號。實有光於右文奬賢之道。事係恩典。自下不敢擅便。上裁何如。同副承旨臣李沆次知。


삼가 신들이 듣건대, 유학자를 높이고 어진 이를 숭상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급선무라고 합니다. 시대가 이미 멀어져서 총애하는 예를 시행할 수 없을 경우, 또한 반드시 묘사(廟祀)를 떠받들고 정표(旌表)를 내려서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모범으로 삼게 할 바탕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유선(儒先)의 자취가 스며 있는, 태어나서 자란 고향(故鄕)이나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고 거닐던 곳에서는 모두 제사를 지내 우러러 흠모하는 뜻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던 날에도 역시 편액(扁額)을 하사하거나 시호(諡號)를 내려 주어서 표창하여 드러내는 도를 거행하였는바, 이 점이 바로 국조(國朝)의 유교 교화가 앞 시대보다 훨씬 더 성대했던 이유입니다.

우리 영남(嶺南) 한 지방은 또 본조(本朝)의 추로(鄒魯)이며 이락(伊洛)입니다. 그 사이에는 특별히 올리는 제사를 홀로 누리는 홍유(鴻儒)와 석학(碩學)이 앞뒤로 서로 이어졌으며, 임금의 각별한 은총과 특별한 기림 역시 모두 후배들에게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신들이 살고 있는 고을만은 묘우(廟宇)를 지어서 제사를 받들고 서원(書院)을 세워서 배움을 닦고 있는 곳이 있는데도, 60여 년이란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편액을 하사받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사림(士林)들이 개탄하면서 한스럽게 여길 바가 아니겠으며, 거룩한 시대의 한 가지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살고 있는 영천군(永川郡)은 바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작은 고을입니다. 고려 말엽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나와서 도학(道學)을 앞장서 밝히어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묘대왕조(宣廟大王朝) 때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한 사람의 진유(眞儒)가 있었으니, 바로 고(故)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신(臣) 조호익(曺好益)이 그 사람입니다.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먼저 조호익의 사업(事業)과 덕행(德行)을 대강 진달드리고자 합니다.

조호익은 천부적인 자질이 도(道)에 가까웠고, 영특하기가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나이가 되기도 전에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는 줄을 알았고, 사우(師友)들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서책 가운데에서 이를 능히 스스로 터득하였습니다.

일찍이 그의 표숙(表叔)인 교리(校理) 신(臣) 주박(周博)에게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빌려 보려고 하였는데, 주박 역시 한 시대의 명유(名儒)였습니다. 주박이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빌려 주지 않자, 조호익은 더욱더 스스로를 책려하면서 분발하여 뜻을 가다듬어 글을 읽었는데, 밤이면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쫓았으며, 낮에는 글 한 편을 다 읽고서야 밥을 먹었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드디어 서책을 싸 짊어지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 왕래하면서 연원(淵源)의 학설에 대해 더욱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에 배움이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이 갈수록 더욱 드러나 온 도(道)의 인사들이 모두들 우러르면서 흠모하였습니다.

선묘(宣廟) 병자년(1576, 선조9)에 일제히 군적(軍籍)을 새로 작성하는 일이 있었는데, 고(故) 찬성(贊成) 신(臣) 최황(崔滉)이 어사(御使)로서 그 일을 감독하면서, 고을 사람 가운데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을 뽑아 감독하는 책임을 맡길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조호익은 모상(母喪)을 당하여 장차 담제(禫祭)를 지낼 때가 되었으나,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이 빈궁(殯宮)에 있어서 길제(吉祭)를 지낼 수 없었던 탓에, 상복을 입은 채 거상(居喪)하고 있었습니다.

최황이 처음에 조호익에게 일을 살피도록 윽박질렀는데, 조호익은 복제(服制)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끝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최황이 자신을 깔본다고 의심하면서 명령을 어긴 데 대해 노하여 토호(土豪)라고 지목해 죄주기를 조정에 청하였습니다. 이에 드디어 관서(關西)의 강동(江東)으로 전가사변(全家徙邊)되었습니다.

창원(昌原)에서 강동까지는 거리가 천여 리가 넘어서 가는 길이 아주 먼 데다가 풍토도 아주 달랐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비통해하면서 걱정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조호익은 태연스러운 얼굴로 길에 오르면서 조금치도 원망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배소(配所)인 강동에 도착하여서는 산속에 집을 짓고 오직 경전을 연구하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를 일삼았습니다. 심의(深衣)에 복건(幅巾) 차림을 하고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 경사(經史)의 서책을 쌓아 놓고 지냈는데, 특히 송(宋)나라 유학자들이 남긴 서책들에 대하여 더욱더 깊이 파고들면서 연구하였습니다. 끼닛거리가 자주 떨어졌어도 태연하게 거처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물품을 보내 줄 경우에는 반드시 의에 맞는가를 헤아려 본 다음에 받거나 사양하였습니다.

관서 지역은 오랑캐들과 인접해 있어서 학문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조호익의 풍모를 듣고는 원근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경전을 손에 들고 학문을 묻는 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에 조호익은 그들을 각자의 재주에 따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규(學規)를 세워서 그들에게 학문으로 나아가는 문호(門戶)를 보여 주었으며, 고례(古禮)를 행하여 그들에게 읍양(揖讓)하는 절차를 가르쳤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학문을 할 줄 알게 되어 울연히 엄숙하고 아름다운 서하(西河)의 유풍(遺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관서 지방 몇 개 고을의 선비들이 지금 학문을 할 줄 알아 유자(儒者)가 되게 된 것은 모두가 조호익의 덕분입니다.

그 뒤에 최황(崔滉)은 스스로 몹시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고 경연 석상에서 여러 차례 조호익의 어짊을 말하면서 임금께 천거하였으며, 자신이 다른 사람을 모함한 죄를 받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직접 조호익에게 가서 사과하기를, “내가 이렇게까지 그대를 모함하였으니, 항상 하늘의 재앙을 받을까 두렵다.” 하였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적에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다시금 조호익의 어짊을 천거하고 원통한 실상을 진달하였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상께서 풀어 주도록 명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한 다음,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유시하기를, “그대가 오랫동안 관서 지방에 있었으므로 서쪽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존경하고 친애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대는 의병을 불러 모으라.” 하였습니다. 이에 조호익은 명을 받들고 달려가 열읍(列邑)에서 장정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일찍이 유성룡과 임반관(林畔館)에서 만났는데, 말이 왕실(王室)에 대해서 미치자 비 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유성룡이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 “초야(草野)에 사는 신하의 충성심이 이와 같으니, 국록(國祿)을 먹는 왕신(王臣)이 도리어 초야에 사는 사람만도 못하구나.” 하였습니다. 또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군기(軍旗)를 세우고 진(陣)을 친 다음,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곡하면서 사배(四拜)를 올리니, 의병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가면서 중화(中和)와 상원(祥原) 사이에서 왜적들을 요격하여 군사의 위세가 날로 떨쳐졌으며 참획한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들이 몹시 꺼려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그의 이름을 써 붙이고서 그 위에 칼을 꽂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뒤에 함경도의 영흥(永興)으로 넘어가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뒤를 치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양산(梁山)에 도착해서 명군(明軍)을 도왔습니다.

조호익은 군중(軍中)에 있으면서는 잠잘 적에 옷을 벗지 않고 잤으며, 대삿갓을 쓰고 가죽 버선을 신기를 아래의 군졸들과 똑같이 하였습니다. 이에 유성룡이 일찍이 칭찬하기를, “조호익은 유생으로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런데도 일찍이 오직 충의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군사들이 모두들 감복하여서 능히 죽을힘을 다해 싸우게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묘께서는 여러 차례 발탁하여 승진시켜 주었으며, 자못 은혜로운 하사를 내렸는데, 혹 별도로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권장하는 유시를 내리기도 하였으며, 혹 특별히 머무르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물어서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습니다.

변란이 평정되자 조호익은 드디어 의병을 해산시키고 남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동안에 비록 잇달아 주부(州府)의 수령 자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기도 하고 취임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말년에는 영천(永川)의 지산촌(芝山村)에 터를 잡아 집을 지은 다음, 고요히 마음을 기르고 스스로의 지조를 지키면서 지냈는데, 일찍이 동구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끊임없이 글을 읽었는데, 늙었다는 핑계로 잠시도 해이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임종하던 날 저녁에도 궤석(几席)에 기대어 앉은 채 책상 위에 있는 서책을 집어 들고 오랫동안 뒤적였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보니 바로 《주자대전(朱子大全)》이었습니다.

조호익은 역(易)과 예(禮)에 대해서 더욱 깊이 파고들었는데, 은미한 이치를 분석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절충한 것이 그가 지은 《주역석해(周易釋解)》, 《가례고증(家禮考證)》 등의 서책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은 실로 《대학(大學)》의 요지를 천명한 것이고,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는 《심경부주(心經附註)》의 뜻을 깊이 밝힌 것입니다. 그 나머지 다른 서책이나 논술 등도 모두 성언(聖言)을 발휘하여 후학들에게 내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조호익의 힘써 행하여 깊은 조예를 이룬 공과 참 이치를 알고 실제로 터득한 공효는 참으로 속일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선묘(宣廟)께서 승하하시자, 조호익은 즉시 군(郡)의 청사(廳舍)로 달려가서 최질복(衰絰服)을 만들어 성복(成服)하였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북쪽을 향하여 곡하면서 슬픔을 다하였습니다. 인산(因山) 날짜가 다가오자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계빈(啓殯)하는 날짜에 맞추어 갔는데, 소식(素食)을 하느라 몸이 병들고 먼 길을 오가느라 더욱 초췌해진 탓에 마침내 그다음 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조호익의 세상에 뛰어난 학문과 남들보다 탁월한 행실, 국난에 임하여 순국(殉國)한 충성심과 도를 밝혀 후학들을 가르친 공로는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는 것이 이상과 같습니다.

조호익이 영남에 있었을 적에는 선정신(先正臣)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 문숙공(文肅公) 정경세(鄭經世),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과 같은 여러 사람들이 혹 같이 사문(師門)에 나아가서 가르침을 받거나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흠모하여 좋아하였는바, 이택(麗澤)의 유익함이 서찰(書札)에 많이 보이고, 경애(敬愛)하는 실상이 시문(詩文)에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일찍이 조호익에게 특별히 이조 참판의 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바로 정경세가 건의하여 남쪽 지방 사림들의 소망을 위로한 것입니다.

‘도를 추구하는 마음은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떠도는 가운데에도 해이해지지 않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심은 젊어서 건장하거나 늙어서 병든 날에도 차이가 없었다. 또 능히 자신이 터득한 바를 미루어 나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어 성취하게 하였는바, 관서 지방에 있을 적에는 문풍(文風)으로 크게 변화시킨 성과가 있었으며, 영남 지방으로 돌아와서는 선비들을 진작시키는 은혜를 끼쳤다.’고 한 것은, 바로 정온이 묘비명(墓碑銘)을 지으면서 드러내어 말한 것입니다.

고(故) 부제학(副提學) 신(臣) 이준(李埈)은 또 조호익을 칭하여 이르기를, “마음을 기른 공부 두터웠었고, 실제로 배운 공부 실천하였네. 안과 밖이 차이가 나지 않았고, 평탄함과 험난함에 한결같았네.[充養之厚 踐履之實 表裏無間 夷險如一]” 하였습니다.

조호익의 문인(門人)인 고(故) 상신(相臣)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이 지은 행장(行狀)에 조호익의 일과 행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자세하게 나와 있는바, 지금에도 모두 하나하나 다시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말들은 또한 신들이 진달드린 바가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견해나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입니다.

조호익이 죽은 뒤에 본군(本郡)의 선비들은 존경하고 흠모하면서 잊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가 평소에 강학(講學)하던 곳에 사우(祠宇)를 창립하여 제사를 모신 지가 지금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본 고을이 변방에 치우쳐 있어 국도(國都)와의 거리가 아주 먼 탓에,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면서 아직까지 편액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거조를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들의 죄입니다.

지금 신들이 멀리서 듣건대, 거룩한 조정에서는 더욱더 문교(文敎)의 교화를 가다듬어, 각 향읍(鄕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는 본조의 유선(儒先)들에 대해서 모두 은혜로운 편액을 하사하여 크나큰 은전을 거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은 감히 양식을 싸 짊어지고 발을 싸매고는 천리 먼 길을 상소를 품고 올라와, 외람스럽고 참람스러움조차도 피하지 않은 채 우러러 성상께 아뢰는 바입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조호익의 학문의 정예롭고 깊음과 사적(事蹟)의 탁월하고 위대함을 속히 살펴보시고, 여러 선비들의 경모하는 마음이 깊고도 간절함과 하소연하는 것이 간절하고도 지극한 점을 굽어 양찰하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명해 서원의 호칭을 하사하여 주소서. 그리하신다면 사문(斯文)으로서도 몹시 다행이겠으며 사림(士林)으로서도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지금 혹 신들에게 말하는 자들이 ‘우리 사림에서 유선(儒先)들을 위하여 서원을 세운 것은, 한 사람이 보통 몇 곳에서 향사(享祀)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의 향사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향사와 충렬사(忠烈祠)의 향사,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향사와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향사와 정산서원(鼎山書院)의 향사 같은 것이 그것으로, 역시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하면서는 오직 한 곳에만 허락하고 있다. 지금 성천(成川)의 제사를 받들고 있는 곳에서 이미 학령서원(鶴翎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그러니 남쪽 지방의 선비들이 다시금 이런 청을 하는 것은 은혜로운 명을 겹쳐서 내려 주기를 요구하는 데에 가까운 점이 있는바, 유사(有司)가 기각시켜 버리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신들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저 학령서원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에서 옛날에 사액한 곳으로, 선비들이 모여서 학업을 닦는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는 본디 조호익을 위하여 특별히 설립한 서원이 아닙니다. 임진년의 전란 이후에 불타 버려 폐해졌던 것을 본토 사람들이 예전의 제도에 따라 중창(重創)하여, 정구(鄭逑)와 조호익을 아울러서 향사한 곳입니다. 그러니 이는 또 조호익만을 전적으로 향사한 곳이 아닙니다.

인묘조(仁廟朝) 때 편액을 하사하면서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을 반사(頒賜)해 주어 이로써 유사(儒士)들을 가르치고 훈도하라고 명하기까지 하였는바, 이는 실로 서쪽 지방에 문교(文敎)의 교화가 떨쳐지지 않은 것을 특별히 진념한 데서 나온 것으로, 역시 전적으로 조호익에게 높이 보답하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진 이를 높이고 덕 있는 이를 숭상하는 은전을 어찌 이로 인하여 폐기시켜 버리고서 마땅히 시행해야 할 곳에 다시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밝게 살펴보신 다음 분명하게 유사에게 신칙해서 단연코 거행하심으로써 사림의 영광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신다면 천만다행스러움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성상을 우러러보매 격렬하고 절실하며 몹시도 간절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비답(批答)은 다음과 같다.

“상소를 보고서 상소의 내용을 모두 알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해 조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대한 예조(禮曹)의 회계(回啓)는 다음과 같다.

“영천(永川)에 사는 생원(生員) 정시간(鄭時衎) 등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니, 본군의 여러 선비들이 참판(參判)에 추증된 조호익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고서 제사를 모신 지가 지금까지 60여 년이나 되는바, 편액을 하사해 주기를 원하여 이처럼 진정(陳情)한 것입니다.

조호익은 천부적인 자질이 영특한 데다 자라면서 더욱더 힘써 공부하였습니다. 죄 아닌 죄로 유배를 당하면서도 일찍이 원망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변방 사람들을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고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깨우쳤습니다.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해서 의로운 명성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난리가 조금 평정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비들의 명망이 더욱더 그에게로 기울었습니다. 이에 어진 재상이 그의 지절(志節)을 천거하였고, 거룩한 임금께서 그의 정충(精忠)을 장려하였습니다. 그러니 평생의 출처(出處)에 있어서 도(道)가 있는 선비라고 할 만하며, 그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한 고을 사림들이 우러러 흠모하는 바입니다.

사우를 세워서 향화(香火)를 받드는 것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더 폐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령서원에서 종향(從享)한 것은 전적으로 향사한 것이 아니어서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백여 명이 넘는 선비들이 소장을 들고 와서 하소연하였으니, 특별히 서원의 편액을 하사하는 것이 실로 문교를 숭상하고 어진 이를 장려하는 도에 있어서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은전(恩典)을 시행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아래에서 감히 편의에 따라 멋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이항(李沆)이 담당하여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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