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_META_TITLE_ 휴관일입니다.


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도잠서원 > 문집

기본정보

좌우로 스크롤하시면 전체 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도잠서원
명칭 『지산집(芝山集)』, 부록 권3, 서(書), 「답도잠서원사서答道岑士林書」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김세렴(金世濂)
소장정보

상세정보

◦ 『芝山集』, 曺好益, 附錄 第3卷, 書, 答道岑士林書[金東溟世濂]

 

日。不佞奉使日域也。諸君子不謂不佞不可。儼然以老先生墓道之刻見屬。義不敢辭。踧踖敬諾。及其竣。還屬時事大變。奔走中外。卒卒無須臾暇得從事筆硯。于今八九年所。歎悚交積。不自意諸君子不但不以爲之督過。曲賜誨誘。千里傳書。辭旨懇勤。一何禮之過而誠之至也。再拜莊誦。惶汗罔措。伏念老先生學問道德。上溯伊洛之源。立言著訓。有能永詔來世。其所以闡明發揚。固非人人所能。况文章鉅公。世自有其人。卽不佞何敢當何敢當。生晩末學。鹵魯滅裂。唯不及出老先生門下是恨。今以文字之役。得執事墓道之刻。榮耀孰大。誠不敢固辭。終始坐孤諸君子盛敎。家禮考證。擴先賢所未發。有非儀節正衡所能顔行。不可不刊布一世。本道物力大屈。恐不可辦得。嶺伯之樂聞入諸剞劂。亦不可必。第當與此地士子。奉以周旋。文集序。亦唯命。性理字義讀書錄。曾在北路刊出者。敢呈各一部。怱擾不宣。


제가 일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을 적에 제군자(諸君子)들께서 부족한 저를 못나다고 여기지 않고 문득 노선생(老先生)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써서 새기는 일을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공경스레 승낙하였습니다. 그 뒤 일을 마친 뒤에는 다시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중외(中外)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몹시 바빴던 탓에 잠시도 짬을 내어 붓을 잡을 겨를이 없었던 지가 지금까지 8, 9년이나 되었으니, 탄식스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교차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하지 않게 제군자들께서 저를 책망하지 않고 곡진하게 깨우치면서 천리 먼 이곳까지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편지 내용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운바, 어쩜 이리도 예가 지나치고 정성이 지극하단 말입니까. 두 번 절한 다음 자세를 바로하고서 읽어 보노라니, 황공스러운 마음에 진땀이 흐르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노선생의 학문과 도덕은 위로 이락(伊洛)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말씀과 가르침은 능히 후세 사람들을 영원히 가르칠 만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천명(闡明)하고 발양(發揚)하는 것은 참으로 아무나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문장에 뛰어난 거장은 각 시대마다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저와 같이 못난 사람이 어찌 감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늦게 태어난 말학(末學)으로서 노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노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는데, 이제 문자를 쓰는 일로써 묘도문자를 새기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감히 고사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종시토록 제군자들의 성대한 가르침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례고증(家禮考證)》은 선현들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바를 확충시킨 것으로서 의절(儀節)과 정형(正衡)에 있어서 능히 앞서지 못할 바가 있으니, 온 세상에 간행하여 반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본도(本道)는 물력(物力)이 크게 부족하여 아마도 비용을 마련해 낼 길이 없을 듯하며, 영백(嶺伯)이 기꺼이 각판(刻板)할 것이라고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지방의 선비들과 더불어서 명을 받들어 주선하는 것이 마땅할 뿐입니다.

문집의 서문(序文)에 대한 것은 역시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성리자의(性理字義)》와 《독서록(讀書錄)》은 일찍이 북로(北路)에서 간행한 것이 있기에 감히 한 부(部)씩을 올립니다. 총망 중에 다 쓰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이미지

  • 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TOP
한국서원 제향인물 동아시아서원 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