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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덕곡서원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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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덕곡서원
명칭 『기언(記言)』, 별집 제24권 - 구묘문(丘墓文) - 承政院右承旨姜公墓碣銘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허목(許穆)
소장정보

상세정보

공은 휘는 대수(大遂)이고 자는 학안(學顔)이며 성은 강씨(姜氏)이다. 그 선대는 본관이 진양(晉陽)인데 고려 태사(太師) 민첨(民瞻)의 후손이다. 여러 세대를 합천(陜川)에 살아서 합천 사람이 되었다. 증조부는 사헌부 집의에 추증된 인수(仁壽)이고, 할아버지는 동부승지에 추증된 세탁(世倬)이고, 아버지는 사간원 사간으로 예조 판서에 추증된 익문(翼文)이다. 공의 신분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루어 3대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다.

만력 19년 신묘년(1591, 선조24) 10월 3일에 공이 태어났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어릴 적부터 재주 있다는 명성이 자자하여, 들은 자들은 공과 사귀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았다. 20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뽑혔고 그 뒷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시강원 겸설서를 제수받았다. 얼마 있다가 사서(司書)로 승진하였고,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갑인년(1614, 광해군6)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였다. 정온(鄭蘊)이 간언을 하다가 사죄(死罪)를 받게 되자 공이 쟁론을 하다가 함께 죄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정인홍(鄭仁弘)이 높은 벼슬로 등용되었다. 공이 일찍이 그를 지적하여 말하기를,

“사사로운 생각을 집요하게 주장하고 남들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를 매우 미워한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인홍이 공을 끊임없이 모함하였다. 처음에는 관직을 삭탈하였다가 결국은 회양(淮陽)에 부처(付處)하였다. 공은 각고의 노력으로 행실을 조심하여 곤경에 잘 대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들 훌륭하게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1) 봄에 인조가 반정을 한 뒤에 풀려나 영변부 판관(寧邊府判官)이 되었다가 곧이어 호조 좌랑이 되었다. 가을에 예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정언(正言)으로 사헌부 지평에 옮겨졌다가 얼마 뒤에 장령에 승진하여 편수관(編修官)을 겸하였다. 병인년(1626)에 다시 장령이 되었고 지제교를 겸하였다. 정묘년(1627)에 오랑캐의 난리가 있자 호소사(號召使) 정경세(鄭經世)의 종사관이 되어 영남에 나가 상주(尙州)와 경주(慶州)의 젊은이들을 효유하여 의병을 모았다. 3월에 오랑캐가 화친을 하자 이에 군병을 해산하였다. 4월에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하였다. 누차 옮겨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었다. 무진년(1628)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갔다가 3년 만에 병으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파직에 해당하였는데, 상이 체직만 하라고 명하였다. 신미년(1631)에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고 경연 검토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봄에 수찬으로 승진하였다. 얼마 있다가 부교리로 승진하였고 경연 시독관을 겸하였다. 여름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고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하였다. 가을에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되어 나갔다. 계유년(1633)에 다시 소명을 받아 수찬이 되었다. 갑술년(1634) 옥당에 재직 중에, 추숭(追崇)이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쟁론하여 무릇 다섯 차례나 차자를 올려 내용이 수천 자에 이르렀다. 을해년(1635) 가을에 사간을 거쳐 제용감 정(濟用監正)이 되었다. 겨울에 암행 어사로 호서(湖西)를 염문(廉問)하여 수령 중에서 아주 심하게 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도태시켰다. 정축년(1637) 봄에 부응교가 되었다. 무인년(1638) 여름에 다시 사간으로 있다가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되어 나갔다. 이듬해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신사년(1641)에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었다. 3년 만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갑신년(1644) 봄에 동부승지가 되었고 경연 참찬관을 겸하였다. 우승지에 이르렀다. 여름에 병조 참지가 되었다. 얼마 있다가 참의로 승진하였다. 해서(海西) 군안(軍案)의 묵은 폐단을 변통해야 한다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겨울에 경주의 부윤이 되었다. 이듬해 겨울에 부호군으로 있으면서 동궁(東宮)의 상제(喪制)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정해년(1647)에 판결사를 거쳐 다시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해 벼슬을 떠났다.

효종 원년 경인년(1650)에 상의 교지(敎旨)에 응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겨울에 다시 판결사로 두 번째로 승정원에 들어갔다. 다음 해 3월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가 1년 만에 벼슬을 떠났다. 이 뒤로 잇따라 소명이 있었으나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1656, 효종7) 봄에 또 교지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말하였는데, 그 내용에 “사치가 너무 지나치고 사심이 난무한다.”는 경계가 있었다. 무술년(1658)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8세였다. 의령(宜寧) 낙수(洛水) 서쪽에 장사 지냈다. 상이 예를 갖추어 제사를 하사하였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들 “어진 대부가 세상을 떠났다.”고들 하였다.

공은 조정에서 50년 가까이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삼가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일 처리를 하여 나라에 보탬이 많았으며, 또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현능하였으므로 떠난 뒤에는 모두들 그리워하며 공의 자애로움을 잊지 못하였다. 만년에 한사만은(寒沙晩隱)이라 자호하고,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한 괘(卦)를 외며 깊이 음미하였고,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어 배우러 오는 자들을 기다렸다. 군내(郡內)에 이연서원(伊淵書院)을 짓고 의령에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어 유자(儒者)들의 공부에 정성을 쏟았는데,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건대 공은 유술(儒術)을 중시하고 온아함을 숭상했으며 공손과 검소와 겸양과 청렴을 평생토록 쓸 대법(大法)으로 삼았다고 한다.

공은 세 번 혼인하여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다. 전 부인(前夫人)은 종실 영제군(寧堤君) 이석령(李錫齡)의 따님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름이 휘연(徽衍)이다. 후 부인(後夫人)은 참봉 이각(李殼)의 따님인데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았다. 아들은 휘만(徽萬)이고, 사위 셋은 현령 이당규(李堂揆), 사인(士人) 김정익(金庭翊), 이시격(李時格)이다. 말취(末娶) 정씨(鄭氏) 부인은 현감 정훤(鄭暄)의 따님인데 자녀가 없다. 또 측실에 아들이 있는데 휘윤(徽潤)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삼가고 신중했으니 / 惟恪惟謹

대부의 몸가짐이요 / 惟大夫之飭也

검소하고 공손했으니 / 惟儉惟恭

대부의 본보기라네 / 惟大夫之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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