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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진주시
가호서원 - 佳湖書院

가호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인 정문부(鄭文孚)[1565~1624]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정문부는 병자호란 이후 창원부사를 역임하면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진주에 정착하려하였고, 이괄의 난으로 사망하기 직전 아들에게 진주에 세거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후 후손들이 진주에 세거하며 서원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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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문화재청 홈페이지
위치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 59-2 (용암리, 충의사)
건립연도 1970
제향인 정문부
문화재 지정 표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진주 충의사]
이칭 / 별칭
기타 사우

상세정보

가호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인 정문부(鄭文孚)[1565~1624]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정문부는 1585(선조 18) 생원시에 합격, 1588(선조 21)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성부참군을 시작으로 홍문관수찬·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배천(崔配天이붕수(李鵬壽) 등과 창의하여 관북 일대를 수복하였다. 1610(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15(광해군 7) 부총관·병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영흥·온성·길주·안변·공주·장단·안주·남원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인조반정 직후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문초를 당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들 가문이 진주에 세거하게 된 계기는 정문부에 의해서였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피병하기 좋은 곳을 찾던 중 창원부사에 재직하게 되었고, 이때 지리적으로 인접한 진주가 마침 선대의 전장과 지리산 등이 있어 피병하기 좋은 곳으로 여겨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죽게 되면서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내려 진주로 가서 살 것을 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주정씨 정문부의 후손들은 진주에 세거하게 되었다.

기존에 정문부를 제향하는 곳으로 네 군데가 있는데 모두 함경도에 있으므로 지방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남한에도 사당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어왔다. 이에 1970년 후손들이 세거하는 진주 귀곡(貴谷)에 가호서원과 충의사(忠義祠)를 창건하였다. 19837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해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2013년에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이모비(移模碑)와 국역비를 건립하였으며 장판각 내부에는 농포집목판 191372면이 소장되어 있다2021년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가을달빛음악회, 논어학교, 힐링문화살롱, 생태문화탐방교실 등의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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