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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진주시
남악서원 - 南岳書院

남악서원은 김유신(金庾信)[595~673], 설총(薛聰)[655~?], 최치원(崔致遠)[857~?]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을 본따 남악서원으로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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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817-1
건립연도 1920
제향인 김유신, 설총, 최치원
문화재 지정 표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이칭 / 별칭
기타 서원

상세정보

남악서원은 김유신(金庾信)[595~673], 설총(薛聰)[655~?], 최치원(崔致遠)[857~?]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후손이다. 증조부였던 구해왕이 신라에 투항하면서 진골귀족에 편입되었다. 642(선덕여왕 11) 신라가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신라 서쪽 경계의 요충지였던 압량주의 도독으로 부임하여 훗날 백제와의 전투를 대비하였다. 644(선덕여왕 13) 소판(蘇判)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백제 와의 전투에서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 등을 점령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선덕여왕 말년 비담의 난이 일어나자 김춘추와 함께 난을 진압하였다. 660년 상대등이 되어 당나라 연합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설총은 통일신라 시대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아버지는 원효대사이며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정평이 나있다. 설총 이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향찰(鄕札)을 집대성하여 한문을 우리말의 형식으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경주설씨의 시조로서 1022(현종 13)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 학자로서 6두품 출신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 가 외국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빈공과에 합격한 바 있다. 당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문서 작성의 일을 담당하였다. 이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명문으로 알려져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885(헌강왕 11) 신라로 귀국한 뒤에도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鑑)이 되었다. 894(진성여왕 8)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시무 10조를 올려 개혁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경주최씨의 시조로서 계원필경(桂苑筆耕),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등을 남겼다.

진주에는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군사요충지를 물색하던 중 신령으로부터 통일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에 진주 유림들은 1920년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을 본 따 남악서원으로 창건하였고 19837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문화재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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