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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창렬사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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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창렬사
명칭 『대산집』, 제42권 - 雜著 - 호남의 통문에 답함 좌도의 사림을 대신하여 작성하였다. 기해년(1779, 정조3)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이상정(李象靖)
소장정보

상세정보

일전에 삼가 보내오신 글을 받고 보니, 학봉(鶴峯) 김 선생의 〈촉석루(矗石樓)〉 시(詩)를 충의(忠毅) 최공(崔公)의 작품이라고 하였고, 최공, 김공(金公), 황공(黃公)을 시 중에서 삼장사(三壯士)라고 하였습니다. 사적이 오래되어 의심쩍고 확실하지 않으면 심기를 차분히 가라앉히고서 찬찬히 실제 사정을 따져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따를지 판단해야 하는데, 보내오신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전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면서 한결같이 강압적이며 조금도 서로 살피고 따져 볼 의사가 없으니, 이는 여러 군자에게 바라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대체로 들은 것은 실제 본 것만 못하고, 후인들이 뒤에 기록한 것은 당일의 기록만큼 믿을 만하지는 못합니다. 송암(松巖) 이공(李公)이 김 선생의 막하(幕下)에 있으면서 날마다 일을 기록하여 한 책으로 엮었는데, 《용사일록(龍蛇日錄)》이 그것입니다. 필치가 완연한데 지금 자손의 집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의 대략에 “임진년(1592, 선조25) 5월 공이 초유기(招諭旗)를 세우고서 조(趙) 아무개, 이(李) 아무개와 함께 진양(晉陽)에 도달하였는데,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은 산골로 숨었으며 성안은 적막하고 강물만 아득히 흐르고 있었다. 조공(趙公)이 선생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앞으로의 형세는 더 이상 손쓸 수가 없습니다. 공과 함께 이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니 굳이 적의 칼날에 죽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이미 애통해하는 전교를 내렸고 하늘은 바야흐로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는 조짐을 보이니, 만약 제군이 군사를 나누어 요충지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는다면 적은 숫자의 군사로도 나라를 일으킬 수 있소. 만약 불행히 그렇지 못한다면 장순(張巡)처럼 지키다가 죽어도 될 것이며, 고경(杲卿)처럼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될 것이오. 혹시라도 그렇지 않을 것을 이 강물에 맹세하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구해 와 각각 한 잔씩 마시고, 공이 시를 지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계사년(1593, 선조26) 4월에 선생이 졸하자 조공과 이공이 떠났으며, 《용사일록》도 여기에서 그칩니다. 6월에 이르러 최공, 김공, 황공이 진양으로 와서 성을 지켰으며 얼마 되지 않아 순절하였으니, 시를 지은 때와는 거의 1년여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이 시가 지어진 때가 과연 계사년 6월이라면, 이공이 왜 뒤의 것을 가져다가 임진년 5월에 기록하였겠습니까. 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10) 천파(天坡) 오공(吳公)이 촉석루에 시판(詩板)을 걸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관리가 부임해 오고 사자(使者)가 들렀을 때와 지역의 부로(父老)들이 전송(傳誦)하면서 한마디도 의심의 말이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여러분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보내오신 글 중에 “어느 해 어느 달에 이 시를 지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한 것은 이 시가 임진년 5월 처음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에 지은 것임을 모르는 것이며, “왜란 초에 경상도 관찰사였는데 술을 샀다고 하였다.”라고 한 것은 당시 외지에서 온 사신의 신분으로 막 도착하였고 아직 경상도 관찰사의 직임을 맡지 않았을 때이며 목사와 판관이 모두 도망가 술을 보내올 사람이 없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용사일록(龍蛇日錄)》을 보지 않고 추측과 생각으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용사일록》을 이상정(李象靖) 씨가 찬술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당시의 일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이 또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보내오신 글에서 인용한 칠현(七賢)의 문집은 다만 삼공(三公)의 충훈(忠勳)과 의열(義烈)을 찬양했을 뿐이니 애초 시를 지은 것에 대한 증거는 아닙니다. 안우산(安牛山)의 경우는 성에서 난리를 겪은 사람을 직접 만나 제공(諸公)이 목숨을 바쳤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니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버리지 못하지만 시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한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휴당(日休堂)의 행장과 《화순지지(和順地志)》는 말씀하신 것처럼 믿을 만하니 또한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 선생의 행장, 연보, 시집, 언행록 그리고 조공(趙公)과 이공(李公)의 행장, 연보에도 모두 이 말이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일휴당의 행장 내용에만 의거하여 제공의 글들을 모두 오류라고 의심하는 것입니까?

읍지의 경우는 후세 사람이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하는 것이니, 송암이 직접 그 옆에 있으면서 당시의 일을 직접 기록한 《용사일록》과 비교할 때에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겠습니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고 인용한 지지(地志)의 내용과 보내오신 글의 내용이 또한 서로 상이합니다. 지지에서는 28일에 황공(黃公)이 이미 탄환을 맞고 죽었으며, 공이 김공(金公), 고공(高公)과 함께 성 남쪽의 누대에 올라 절구 한 수를 읊은 뒤에 절도사의 인장을 허리에 차고서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고공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황공은 그중에 없었다는 것이며, 시를 지은 것은 죽던 날인 28일 저녁으로 하루 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내온 글에서 꼽은 삼장사에는 함께 누대에 올랐던 고공이 빠지고 그 자리에 없었던 황공을 끌어왔으며, 시를 지은 날짜도 죽던 날인 28일을 취하지 않고 절의를 세웠던 하루 전날이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바뀌었고 날짜가 어긋납니다. 만약 지지의 내용에 근거하면 보내신 글에서 황공을 끌어대고 하루 전이라고 한 것이 잘못이며, 보내신 글의 내용이 맞는다면 지지의 내용에서 고공을 거론하고 28일이라고 한 것이 틀립니다. 또 게다가 황공이 탄환을 맞고 먼저 죽었고 최공이 그 광경을 목도했으니 그를 초혼(招魂)하던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을 텐데,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조리고 서로 웃으며 장강(長江)을 가리키기를 한결같이 생전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듯이 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인정과 사리에 맞겠습니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의 김공과 황공의 전(傳)을 참고해 보면, 성이 함락되던 날에 김공은 촉석루 위에 있었는데, 맏아들과 막하의 양산숙(梁山璹) 등 친병(親兵) 10여 명만이 곁에 있었으며,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서 물로 뛰어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제공과 함께 모여 시를 지었고 일시에 강으로 투신하였다면 어찌하여 김공만 1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까. 황공은 성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크게 이르러 해자의 물을 터 웅덩이를 메웠고 흙으로 산을 쌓아 높은 누대를 만들었으며 대나무를 엮어 만든 구조물과 나무로 만든 궤짝 같은 것을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니, 포탄과 탄환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이 여러 장군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밤낮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9일간 서로 대치하다가 28일에 이르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9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여러 장수와 함께 있었다면 당일과 전날은 물론이며 황공, 김공, 최공도 따질 것 없이 모두 술 마시며 시를 짓고 담소하며 물결을 가리킬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촉석루 아래 정충비(旌忠碑)가 세워진 곳은 바로 그분들이 순절한 지점입니다. 이 지점과 이 시가 과연 보내온 글에서 말한 최호(崔顥)와 이백(李白)의 학루(鶴樓), 봉대(鳳臺)와 마찬가지라면 비명(碑銘)을 지은 사람이 마땅히 이 시로 글감을 삼았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단 말입니까. 영묘(英廟)께서 내리신 제문의 경우는 참으로 바꿀 수 없는 법과도 같으며, 지엄한 성상의 말씀은 가리키는 뜻이 두루 포괄하고 있어 감히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번 계사년(1773, 영조49)에 귀도(貴道)의 선비가 남원(南原)의 정충당(旌忠堂)에서 발문(發文)하여 저희 고장으로 보내면서 그곳에 보관하고 있던 고사(故事)와 일기(日記)를 베껴 보여 주었는데, 그 일기에 “김 아무개가 조 아무개, 이 아무개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 이 시를 지었는데, 그 후 세 명의 대장이 촉석루에서 죽었으니 바로 그 증험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귀도의 사림이 참으로 이 시를 김 선생이 지은 것으로 여기고 세 분 열사(烈士)가 순절한 것을 그 증험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내오신 글에서는 도리어 최공이 자신이 짓고 자신이 순절하였다고 하니, 귀도 사림의 견해가 전후로 각기 달라 서로 모순이 됩니다. 보내오신 글에서 말씀하신 “어디로 귀결되겠습니까.”라는 탄식은 마땅히 여러분이 스스로 살펴야 하는 것이지, 저희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 ‘장사(壯士)’ 두 글자는 애초 지극한 경지의 칭호가 아니며 몇 마디 짧은 시구는 절의의 실상에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김 선생은 이 시가 있다고 해서 더 중시되지 않으니, 삼공도 어찌 이 시가 없다고 하여 손상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격동하여 반드시 결정지으려 하는 것은 김 선생을 비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삼공을 크게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말투에 있어서는 선배들을 업신여기며 조금도 겸양과 경외의 모습이 없으니, 일의 시비는 논할 것도 없이 이러한 태도는 우선 좋지 않습니다. 저희가 여러분과 한 번 만난 적도 없으니 힘들여 해명하면서 시끄러운 논쟁에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믿을 만한 옛 사적을 근거로 이 일의 시비를 밝힐 뿐입니다. 삼가 여러분께서 잘 살펴봐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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