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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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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龍洲遺稿』, 제12권, 잡저(雜著), 「절효 선생의 효문명석 이야기〔節孝先生孝門銘石說〕」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趙絅
소장정보

상세정보


도주(道州 청도(淸道))의 진사 이모(李某) 군이 내 집으로 찾아와 자기 고을 어른들의 말을 전해주었다.

“영락(永樂) 연간(1403~1424)에 우리 고을에 절효 선생(節孝先生)이 있었다. 선생의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으며, 선생에 대한 정려(旌閭)의 명문(銘文)은 실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이 쓴 것이니, 선생의 사적은 후세에 전해지기에 참으로 충분하다.

다만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백여 년인데,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절효 선생의 후손으로 탁영공(濯纓公)과 삼족당(三足堂)같은 분들이 있었으나 점필재의 당시에 탁영공은 아직 어렸으니 하물며 증손인 삼족당의 경우이겠는가. 두 분 선생이 그 글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근자에 우리 고을의 선비들이 효문명(孝門銘)을 새겨 덕을 연모하는 우리 고을 사람들의 정성을 담고자 하였다. 또한 탁영공과 삼족당까지 모두 더하여 비석에 보충한다면 어찌 절효 선생을 빛내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우리 고을의 젊은이들이 모두 절효 선생에게 이와 같은 자손이 있음을 알게 될뿐더러 탁영공과 삼족당에게 이와 같은 조상이 있음을 알게 되어, 서로 솔선하여 자손을 훈계하여 행실을 가다듬고 이름을 세우는 일을 대대로 게을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어찌 우리 고을의 한 가지 커다란 공령(功令 학사에 대한 규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너는 서울로 가서 문장에 뛰어난 지체 높은 관원을 만나 글을 청하라.”

나는 자리에서 머뭇거리며 감히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이군은 물러났다가 재차 다시 왔는데, 그의 뜻을 살피니 글을 얻지 못하면 자기 고을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그의 굳고 간절한 요청에 감동하여 그가 가져온 문서를 살펴보았다.

절효 선생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이가 네 사람이다. 둘째 아들이 바로 집의 김맹(金孟)인데 김맹은 아들 셋을 낳았으며 모두 문장과 행실이 있어 티끌을 줍듯 아주 쉽게 갑과와 을과로 차례로 합격했다. 그 맏이가 김준손(金駿孫)인데 직제학을 지냈고 이 분이 삼족당(三足堂)을 낳았다.

막내는 김일손(金馹孫)이니 이 분이 탁영(濯纓) 선생이다. 탁영 선생은 점필재에게 수업하여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다. 성종조(成宗朝)에 대책(對策)으로 급제하였는데, 세상에서 이른바 중흥책(中興策)이라는 글이다. 그 문장의 기세가 웅장하고 분방하여 마치 강물이 흐르는 듯한 글이다. 저술한 《탁영집(濯纓集)》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탁영 선생은 뜻이 높고 도도하며 강직한 성품이라 사관(史官)의 붓을 잡게 되자 직필을 행할 뿐 간사하게 아첨하는 글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 때문에 동시(東市)의 화(禍)를 입게 되었으니 지금까지도 《무오록(戊午錄)》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삼족당은 이름이 대유(大有)이고 자는 천우(天祐)이다. 중종(中宗) 초에 유사(儒士)를 숭상하여 조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문정공이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자고 건의하여 청도군에서 삼족당 선생을 천거하니 호조 좌랑 겸춘추에 발탁되어 정언에 이르렀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나중에 칠원(漆原) 현감이 되었다. 기묘년(1519, 중종14) 겨울에 화변이 일어나 소인들이 무고하여 현량과가 폐지되었다. 인종(仁宗) 말엽에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삼족당 선생은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과 한림 신준미(申遵美)와 더불어 나아가지 않았으니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곧 운문산(雲門山)으로 들어가 우연(愚淵) 가에다 집을 지어 삼족당(三足堂)이라 이름을 붙이고는 여기서 수(壽)를 마쳤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그의 묘표(墓表)에 적기를 “굉대하고 깊은 국량으로 그 인(仁)에 힘썼고, 격앙된 언론으로 그 의(義)를 굳세게 지켰네.”라 했으니 삼족당의 인품을 잘 표현해 냈다 하겠다. 그 외의 여러 빛나는 행실은 현량과의 천목(薦目)에 상세하다고 한다.

아, 절효 선생의 효는 미물까지도 감동시키는 효성이었다. 미물 가운데 패려한 것으로 호랑이만한 것이 없는데 호랑이조차도 그 효성에 감동되어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길이 들었다. 하물며 밝고 밝은 하늘이 이런 분을 비춰 주어 백세의 복록을 내리지 않으시겠는가! 아들이 많기로는 여섯 명에 이르렀고, 여섯 아들이 재주 있고 어질기까지 하였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말을 징험할 수 있다. 하물며 손자로서 탁영 선생이 나왔고 증손으로 삼족당이 또 나와서 천지의 순수하고 빼어난 기운이 김씨 일문(一門)에서 피어나고 자라나 삼대에 이르렀으니 기이하고도 기이하도다!

혹자는 탁영 선생이 불의의 죽임을 당했고 삼족 선생은 자신의 뜻을 모두 펼치지 못하여 천명과 시운에 유감을 돌리고 김씨 가문이 제대로 보답 받지 못한 것을 흠으로 여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우리 부자(夫子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지사(志士)는 구렁에 있을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라고. 죽어 구렁에 버려지고 머리를 잃는 것을 군자가 어찌 병통으로 삼겠는가. 닥쳐오는 바에 따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이니 참으로 탁영 선생과 삼족 선생은 우리들이 하늘에서 받은 이치를 다하였다 하겠다.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한때 일신의 불행을 겪은 것으로 본다면 비록 하늘이 어진 사람을 박대한 것 같지만, 만세토록 변치 않을 이름이 길이 남아 천지와 더불어 썩지 않으리니 그 얼마나 후대한 것이겠는가. 지초와 난초는 불탄 뒤에도 향기를 풍기고, 보검은 땅에 묻힌 뒤에도 그 검기(劍氣)가 도약하는 법이다. 나는 탁영 선생과 삼족 선생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도주의 선비들이 이미 이 두 분 선생에 대해 백 년이 넘도록 하루 같이 제향을 올려 왔으며, 또 선배들이 미처 할 겨를이 없었던 일을 행함으로써 온 고을을 깨우치고 있으니 모두 적어 둘 만하다.

節孝先生孝門銘石說


道州晉士李君某踵余門。致其鄕父老之語曰。永樂年間。吾鄕有節孝先生。先生之孝行。載在三綱行實中。先生旌閭之銘。實佔畢金先生筆。先生事蹟之傳世行後。亦良足矣。顧先生歿殆二百餘載。尙闕維樹之石。且也節孝之孫。有濯纓公有三足堂。而當佔畢時則濯纓尙少。況曾孫三足堂乎。二先生之不見錄於其文。固也。乃者吾鄕人士謀刻孝門銘。以寓吾鄕戀德之誠。如又擧濯纓,三足補諸顯刻。奚亶于節孝有光。吾鄕之小子後生咸知節孝之有此孫。而濯纓,三足之有此祖也。相率而戒子孫。砥行立名。世世無怠。茲豈非吾鄕之一大功令也。汝其走京師。謁薦紳先生文。敢以請。余逡巡敝席。遜不敢當。李君退而復來者再。觀其意。不得文不返鄕也。余遂感其堅懇。按其所操狀。節孝先生生丈夫子六人。知名者四人。第二郞卽執義孟。孟生三子。俱有文行。次第取甲乙科如拾芥。長駿孫。官直提學。是生三足堂。季馹孫。卽濯纓先生也。濯纓受業於佔畢齋。早以文鳴。成廟朝闡大對。世所稱中興策者。其文汪洋放肆。若注江河。所著濯纓集行于世。性簡亢棘棘。其秉史筆也。直書不饒邪佞。竟以此被東市之禍。至今人讀戊午錄者。無不泣數行下。三足堂名大有。字天祐。中廟初尙儒。委任趙文正公。公建議行賢良科。淸道郡以先生推上。擢拜地部郞兼春秋。至正言。皆辭。后宰漆原。己卯冬。禍作。群小誣罷薦科。仁廟末。命復科。先生與李灘叟延慶,申翰林遵美不就。物論多之。迺入雲門山。築室于愚淵上。號三足堂。以壽卒。曺南溟植題其墓表曰。辦局宏深。勿勿乎其仁也。言論激昂。僩僩乎其義也。可謂畫出三足堂人稟者矣。其他群行灼灼。於薦目詳云。噫。節孝先生之孝。感物之孝也。物之盭者莫如虎。虎且感其誠孝。馴如畜狗。況昭昭之天其不降監於是。而與之百祿哉。多男至於六丈夫。六丈夫才且賢也。則天之報施善人。驗矣。又況在孫。濯纓先生出焉。在曾孫。三足堂又出焉。天地精英之氣。發毓於金氏一門。至于三世。奇哉奇哉。或以濯纓之不得死。三足之不盡展布。歸憾於天與時。爲金氏食報之歉。此則不然。吾夫子不云乎。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溝壑喪元。君子何病。隨所遭而爲吾所當爲。固濯纓,三足之能盡吾所受於天之理者在。詎不韙哉。一時一身之不幸。雖若天之薄乎賢者。萬世之名永長存。與天地不朽。則其厚何如哉。芝蘭焚而后香聞。寶劍埋而后氣騰。吾於濯纓,三足亦云。道州之士旣俎豆此二先生。越百年如一日。又修前輩之未遑事以警一鄕。俱可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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