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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자계서원 > 현판·목판·비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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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자계서원
명칭 김극일 정려비(金克一旌閭碑)
문화재 지정 표기
구분
형태사항 크기: 높이 170 너비 79 두께 24
수량: 1
재질:
위치 자계서원 내
기타

상세정보

판독문

 

節孝金 先生旌 閭碑 有明朝鮮國節孝金先生?閭 碑銘幷序 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 贈諡 文簡公?畢齋金先生諱宗 直 撰 後學通訓大夫行吏曹正郞 兼春秋館記注官校書館校 理 世子侍講院司書金佐 明謹書 嘉義大夫吏曹參判兼藝文 館提學 世子左副賓客五 衛都摠府副摠管呂爾 徵謹篆 成化十八秊壬寅春前執義金 先生孟自淸道遣其子驥孫馹 孫從余問學且以書索銘其先 君子孝行之碑其言曰先公諱 克一金海人也金海金官國始 祖首露王前史不詳其所自出 以爲金卵入金合從天而降遂 以金爲姓傳至十世末王仇亥 以其地降附新羅子孫皆從大 角干金庾信乃其後也居故國 者世爲州吏高麗時有名管者 始應科目登于朝管生文淑經 德齋生文淑生伉都制庫判官 伉生?義興縣監是吾先公之 考也公幼有至性祖父閒居鄕 里凡有出入必奉杖?以隨? 步未嘗離祖父?畜二妾祖母 朴夫人有不協意往往不食公 ?八年亦不食待其飯亦飯祖 父日以琴歌飮博自娛或繼以 夜每食公手具饌羞必有酒肉 與吾先?相儆或思所以悅耳 目樂心志者無所不至永樂丙 申春祖母病疽良苦公親?其 血而愈及秩以他疾終公勺飮 不入口幾至滅性卜葬于豊角 縣之境距家三十里仍廬其側 每朝夕奠後必以草?徒步來 省父所而返雖降寒暑兩不少 懈也越五秊庚子祖父寢疾泄 利不常公意其爲嗜酒爛暘所 致貯之器埋于地尋出嘗之知 必危大戚及?合?于祖母之 兆哀毁踰前喪每晨夕伏墓側 逮闇不止有虎來?其傍不? ?之以祭所撤之食去而復來 未嘗爲害里人異之自居廬以 來凡關家事皆?不問?杖不 出洞口旣服?奉事祠堂盖處 得異味節物不薦則不敢食待 客應事雖倉卒未嘗坐父母平 日之坐事二庶母加於父在時 飮食衣服所資畢給及死葬送 盡禮心喪至期每遇時祭必以 紙錢?焉公性恬靜不求仕宦 公外舅嘉善漢城府尹李公? 方在朝勸公仕辭以親老不願 一日離也遂終身白衣唯日日 淨掃一室整冠危坐讀小學書 敎子弟必稱張公藝以勉之與 里中人作睦族契凡禍患相恤 昏冠相慶春秋吉日徵遂宴遊 俱有節目鄕隣執友之死必以 情好隆煞其弔賻且不進酒肉 雖於婢僕賤微亦然故一句肉 食不過二三日享年七十六而 卒前郡守李椅具實狀聞于朝 後郡守趙?承朝旨?其閭孟 今激事還故丘慨公之行不? 于石无以昭?于后世願君筆 之以慰我顯親之丹?焉宗直 拜而復曰孝爲百行之首公之 純篤如是可與曾參黔婁?? 於千載矣吾聞有德者必有後 旣有先生以爲之嗣而先生昆 季之子又將?然出頭角趾美 其業者不一是能有後矣宗直 無狀幸今謬?太史氏之列記 載其事也況長者有命其敢辭 諸遂錄先生之書而係之以詞 曰 人有懿行孝莫爲先 誰 無父母鮮矣克全 金官遠裔 乃有斯人 ??秉誠白首愈 新 參乎不愧婁也思齊 神 物亦感來衛其棲 二庶之終 心哀以期 玆皆大者其餘可 知 公藝百忍公則裕如 一旬 九蔬豈勉强且 潛德有報? 天之定 有子有孫聲實俱稱 宜其引之袞袞公卿 我作 此詩爲勸孔明 道州進士李君光義踵余門致 其鄕父老之語曰永樂年間吾 鄕有節孝先生先生之孝行載 在三綱行實中先生?閭之銘 實?畢金先生筆先生事蹟之 傳世行后亦良足矣顧先生? 殆二百餘載尙闕維樹之石且 也節孝之孫有濯纓公有三足 堂爲當?畢時則濯纓尙小況 曾孫三足堂乎二先生之不見 錄於其文固也乃者吾鄕人士 謀刻孝門銘以寓吾鄕戀德之 誠如又擧濯纓三足補諸顯刻 奚亶于節孝有光吾鄕之小子 後生咸知節孝之有此孫而濯 纓三足之有此祖也相率而戒 子孫砥行立名世世无怠玆豈 非吾鄕之一大功令也汝其走 京師謁薦紳先生文敢以請余 逡巡敞席遜不敢當李君退而 復來者再觀其意不得文不返 鄕也余遂感其堅懇按其所操 狀節孝先生生丈夫予六人知 名者四人第二郞卽執義孟孟 生三子俱有文行次第取甲乙 科如拾芥長駿孫官直提學是 生三足堂季馹孫卽濯纓先生 也濯纓受業於?畢齋早以文 嗚 成廟朝?大對世所稱中 興策者其文汪洋放肆若注江 河所著濯纓集行于世性簡亢 棘棘其秉史筆也直書不饒邪 ?竟以此被東市之禍至今人 讀戊午錄者無不泣數行下三 足堂名大有字天祐 中廟初 尙儒委任趙文正公公建議行 賢良科淸道郡以先生推上擢 拜地部郞兼春秋至正言皆辭 后宰漆原己卯冬禍作群小誣 罷薦科 仁廟末命復科先生 與李灘?延慶申翰林遵美不 就物論多之?入雲門山築室 于愚淵上號三足堂以壽卒曺 南冥植題其墓表曰辦局宏深 勿勿乎其仁也言論激昻?? 乎其義也可謂畵出三足堂人 稟者矣其他郡行灼灼於薦目 詳云噫節孝先生之孝感物之 孝也物之猛者莫如虎虎且感 其誠孝馴如畜狗況昭昭之天 其不降監於是而與之百祿哉 多男至於六丈夫六丈夫才且 賢也則天之報施善人驗矣又 況在孫濯纓先生出焉在曾孫 三足堂又出焉天地精英之氣 發毓於金氏一門至于三世奇 哉奇哉或以濯纓之不得死三 足之不盡展布▨憾於天與時 爲金氏食報之?此則不然吾 夫子不云乎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溝壑喪元君 子何病隨所遭而爲吾所當爲 因濯纓三足之能盡吾所受於 天之理者在?不?哉一時一 身之不幸雖若天之簿平賢者 萬世之名永長存與天地不朽 則其厚何如哉芝蘭?而后香 聞寶劒埋而后氣騰吾於濯纓 三足亦云道州之士旣俎豆此 三先生越百年如一日又修前 輩之未邊事以警一鄕俱可書 也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 學知成均館事同知春秋館 事 世子右賓客趙絅謹跋 崇禎九秊丙子治石越十六秊 辛卯月日立


 

해석문


절효(節孝) 김선생(金先生) 정려비(旌閭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절효(節孝) 김선생(金先生)의 정려비명(旌閭碑銘) : 서문을 병기함.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겸(兼) 지경연사(知經筵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증시(贈諡) 문간공(文簡公) 점필재(?畢齋) 김선생(金先生) 종직(宗直) 지음. 후학(後學)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이조정랑(吏曹正郞) 겸(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김좌명(金佐明) 삼가 글씨를 씀.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여이징(呂爾徵) 삼가 전액(篆額)을 씀. 성화(成化) 18년 임인년(1482, 성종 13) 봄에 전(前) 집의(執義) 김선생(金先生) 맹(孟)이 청도(淸道)에서 아들 기손(驥孫)과 일손(馹孫)을 보내 나를 쫓아 학문을 하도록 하면서, 또한 서찰을 보내 선군자(先君子)의 효행비(孝行碑)에 새길 명문(銘文)을 구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선공(先公)은 이름이 극일(克一)이고 김해인(金海人)이다. 김해(金海)는 금관국(金官國)으로,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전사(前史)에 그 내원(來源)이 상세하지 않으나 금란(金卵)이 금합(金合)에 담겨져 하늘에서 내려와 이에 김(金)을 성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가 전하여 10세에 이르러 마지막 왕 구해(仇亥)가 그 땅으로 신라(新羅)에 복종하였고 자손이 모두 따랐다.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은 곧 그 후손이다. 옛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대대로 주리(州吏)가 되었는데, 고려 때에 관(管)이라는 분이 처음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에 벼슬하였다. 관이 문숙(文淑)을 낳았는데 경덕재(經德齋 : 고려 때 <시경>을 강학하던 학교)의 생도였다. 문숙이 항(伉)을 낳았는데 도제고판관(都制庫判官)이었다. 항은 서(?)를 낳았는데 의흥현감(義興縣監)이었다. 이분이 우리 선공(先公)의 부친(父親)이다. 공은 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조부(祖父)가 향리(鄕里)에 한거(閒居)하고 있었는데 무릇 출입함에 반드시 지팡이와 신을 받들어 수행하였고 한 발자국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조부가 늘그막에 두 첩을 두어 조모 박부인(朴夫人)이 불편해하며 왕왕 음식을 먹지 않자, 공이 이때 겨우 8세였으나 또한 먹지 않고 드시기를 기다려 또한 먹었다. 조부가 매일 거문고와 노래와 술과 장기놀이를 즐기며 혹 밤까지 계속하였는데, 매번의 음식을 공이 손수 갖추되 반드시 술과 고기를 상에 올렸다. 우리 선비(先?)와 서로 경계하며 이목(耳目)을 기쁘게 해드리고 심지(心志)를 즐겁게 해드릴 방법을 생각함에 도모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영락(永樂) 병신년(1416, 태종 16) 봄에 조모(祖母)가 종기를 앓아 참으로 고통스러워하였는데 공이 직접 피를 빨아 낳았다. 가을에 다른 질병으로 죽으니 공은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풍각현(?角縣)의 경계에 장사지냈는데 집과의 거리가 30리였다. 이에 그 옆에 여막을 짓고 매일 조석으로 음식을 올린 후 반드시 짚신을 신고 걸어 와서 부(父)를 문안하고 돌아갔다. 비록 성한 추위나 더위 및 비가 오더라도 조금도 그만두지 않았다. 5년이 지난 경자년(1420, 세종 2)에 조부가 병으로 누웠는데 설사가 예사롭지 않았다. 공은 조부가 술을 즐겨 상한 위장이 불러온 결과라 여기고서, 그릇에 변을 담아 땅에 묻어두고 얼마 있다가 꺼내서 맛보고 반드시 돌아가실 것을 알았다. 돌아가심에 조모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슬퍼하여 몸을 상함이 조모의 상보다 더 심하였는데, 매일 조석으로 묘 곁에 엎드려 있으면서 어두워져도 그치지 않았다. 호랑이가 와서 그 옆에 웅크리고 있어도 겁내지 않고 제사지내고 철상한 음식을 주었다. 호랑이가 갔다가 다시 왔으나 한 번도 사람을 해치지 않아 마을 사람이 경이롭게 여겼다. 여묘에 거처하면서 부터는 가사(家事)에 관련된 것은 모두 던져두고 묻지 않았고, 저장(?杖:상주의 지팡이)을 짚고 동구(洞口)로 나가지 않았다. 상기(喪期)가 끝난 후 사당(祠堂)을 받듦에 더욱 공경하여, 별다른 음식이나 시절의 식물(食物)을 얻으면 사당(祠堂)에 올리지 않고는 감히 먹지 않았다. 손님을 상대하거나 일에 응할 때 비록 갑작스러운 순간이라도 부모가 평소에 앉던 자리에는 한 번도 앉지 않았다. 두 서모(庶母)를 섬김에 부(父)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음식과 의복을 모두 갖추어 드렸다. 돌아가심에 장례를 극진히 하였고 심상(心喪)을 1년 동안이나 하였으며 매번 사시제(四時祭) 때마다 반드시 지전(紙錢)을 붙였다. 공의 성품은 편안하고 조용하며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공의 장인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윤(漢城府尹) 이공(李公) 간(?)이 그때 조정에 있으면서 공에게 벼슬을 권하였는데, 공은 어버이가 늙어 하루도 떨어져 지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종신토록 포의(布衣)로 지내면서 오직 매일 방 하나를 청소하고 관을 바로 쓰고 꿇어앉아 <소학(小學)>을 읽었다. 자제(子弟)를 가르침에 반드시 장공예[張公藝 : 당나라 사람으로 인(忍)의 덕목으로써 9대가 한집안에 살았다]를 일컬으며 북돋웠다. 마을 사람들과 목족계(睦族契)를 만들어서 모든 환난에 서로 구휼하고, 관혼(冠婚)의 예에 서로 축하하며, 봄가을의 길일에 함께 어울려 잔치를 벌이며 놀았는데, 모두 절목(節目)을 두었다. 고을의 벗이 죽음에 반드시 정분의 고하에 따라 조문하였고 또한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비록 천미한 종에게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육식하는 날이 열흘에 두서너 날에 지나지 않았다. 향년 76세로 졸(卒)하였다. 전 군수(郡守) 이의(李椅)가 실장(實狀)을 갖추어 조정에 알렸고, 뒤에 군수 조금(趙?)이 조정의 어지(御旨)를 받들어 정려(旌閭)하였다. 맹(孟)이 지금 일을 그만두고 옛집으로 돌아옴에 공의 행실을 돌에 새기지 않아 후세에 밝힐 수 없음을 개탄하였다. 바라건대 그대가 이것을 기록하여 나의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단성(丹誠)을 위로해주시오. 종직(宗直)은 절하고 답하여 말한다. 효(孝)는 백행(百行)의 으뜸이다. 공의 순전하고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증삼(曾參 : 공자 제자 증자)과 검루[黔婁:남재(南齋) 유검루(庾黔婁)로, 어버이의 똥을 맛보고서 병을 진단했다]와 천년토록 어깨를 견줄 만하다. 나는 들으니 유덕자(有德者)는 반드시 후손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선생(先生)이 대를 이었고 선생의 자식들이 또한 장차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낼 것이니, 가업을 아름답게 이을 사람이 하나가 아니니 이것은 후손이 있는 것이다. 종직은 볼품없는 사람인데 요행히 지금 외람되이 태사씨(太史氏)의 열(列)에서 사적을 기록한다. 하물며 장자(長者)의 명령이 있는데 감히 사양하겠는가! 이에 선생의 서찰 내용을 기록하고, 명(銘)을 이어 붙인다. 사람에게 있어 아름다운 행실은 효(孝)가 가장 우선인데, 누가 부모가 없겠는가마는 잘 해내는 사람이 드무네. 금관(金官)의 먼 후손 중에 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어릴 때 정성스러웠고 늙어서 더욱 새로웠네. 증삼(曾參)에 부끄럽지 않고 검루(黔婁)와 견주었는데, 신물(神物) 또한 감응하여 처소에 와서 호위했네. 두 서모(庶母)의 죽음에 마음으로 슬퍼하며 1년을 보냈으니, 이러한 것은 큰 것이며 그 나머지를 알 만하네. 장공예(張公藝)의 백인(百忍)도 공에게는 오히려 여유가 있으니, 열흘에 9일 소식(蔬食)을 한 것이 어찌 억지였겠는가? 잠덕(潛德)은 보답이 있으니 푸른 하늘의 이치인데, 자손이 있어 명실(名實)이 합치했네. 의당 이끌어 대대로 공경(公卿)에 삼아야 할 것이니 나는 이시를 지어 더욱 밝혀 권면하노라. 청도(淸道)의 진사(進士) 이군(李君) 광의(光義)가 나의 집에 찾아와 그의 향촌의 부로(父老)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영락(永樂) 연간(年間)에 오향(吾鄕)에 절효선생(節孝先生)이 있었는데, 선생의 효행은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려 있다. 선생을 정려(旌閭)한 명문(銘文)은 실로 점필(?畢) 김선생(金先生)의 글인데, 선생의 사적(事蹟)이 후세에 전해져 시행되는 데 참으로 족하다. 생각건대 선생이 죽은 후 거의 이백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 비를 세우지 못했다. 또한 절효(節孝)의 후손에 탁영공(濯纓公 : 김일손)과 삼족당(三足堂 : 김대유)이 있는데, 점필(?畢)이 산 때를 당해 탁영(濯纓)이 오히려 작아졌으니 하물며 증손(曾孫) 삼족당(三足堂)에 있어서랴? 두 선생이 글에 기록되지 못한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이에 오향(吾鄕)의 인사(人士)들이 효문명(孝門銘)을 깎아 오향(吾鄕) 사람들의 덕을 사모하는 정성을 쏟으려고 도모하는데, 만약 또한 탁영(濯纓)과 삼족(三足) 두 분을 보태어 현각(顯刻)한다면 어찌 다만 절효(節孝)에게 빛이 될 뿐이겠가? 오향(吾鄕)의 소자(小子)와 후생(後生)이 모두 절효(節孝)가 이러한 후손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탁영(濯纓)과 삼족(三足)에게 이러한 조상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이끌어 자손을 경계하고, 굳게 실행하며 입명(立名)하면서 대대로 게으름이 없으면, 이것이 어찌 오향(吾鄕)의 하나의 큰 법도가 되지 않겠는가? 네가 서울로 달려가 고귀한 분을 찾아뵈어라. 향촌의 부로(父老)가 이와 같이 말하므로 감히 청한다고 하였다. 나는 물러나 자리를 떨며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이군(李君)이 물러갔다가 다시 온 것이 두 번이었다. 그의 뜻을 살펴보건대 글을 얻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에 그의 변함없는 정성에 감동하여, 들고 온 행장을 살펴보았다. 절효선생(節孝先生)은 장부자(丈夫子) 6인을 낳았는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4인이다. 제2랑(第二郞)이 곧 집의(執義) 맹(孟)이다. 맹은 세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문행(文行)이 있어 차례로 과거에 합격하기를 풀을 줍듯 하였다. 장자 준손(駿孫)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는데 이분이 삼족당(三足堂)을 낳았다. 계자(季子) 일손(馹孫)은 곧 탁영선생(濯纓先生)이다. 탁영(濯纓)은 점필재(?畢齋)에게 수업하였는데 일찍부터 문(文)으로 알려졌다. 성묘조(成廟朝)에 올린 대대(大對)는 세상에서 중흥책(中興策)이라고 일컫는 것인데, 그 글이 넘실거리며 드넓은 것이 강물이 터져 흐르는 것 같다. 지은 바의 <탁영집(濯纓集)>이 세상에 전한다. 성품이 간결하고 올곧다. 사필(史筆)을 잡아서는 직서(直書)하며 사녕(邪?)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이 때문에 동시(東市:죄인을 죽이는 곳)의 화를 당했다. 오늘날 <무오록(戊午錄)>을 읽는 사람은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음이 없다. 삼족당(三足堂)은 이름은 대유(大有)이고 자(字)는 천우(天祐)이다. 중묘(中廟) 초에 선비를 숭상하여 조문정공(趙文正公)에게 위임하였는데, 공이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자 청도군(淸道郡)에서는 선생을 추천하여 올렸다. 발탁되어 지부랑(地部郞 : 호조 낭관) 겸(兼) 춘추(春秋)를 배수하였고 정언(正言)에 이르렀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뒤에 칠원(漆原)의 읍재(邑宰)가 되었다. 기묘년(1519, 중종 14) 겨울에 화(禍)가 일어남에 소인들이 무고하여 천과(薦科)를 파직하였다. 인묘(仁廟) 말에 다시 회복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선생과 이탄수(李灘?) 연경(延慶)과 신한림(申翰林) 준미(遵美)는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가상하게 여겼다. 이에 운문산(雲門山)에 들어가 우연(愚淵) 가에 집을 짓고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으며, 수(壽)를 누리고 죽었다. 조남명(曹南冥) 식(植)이 묘표(墓表)에 쓰기를 “일을 처리하는 도량이 굉심(宏深)하였으니, 근면하다 그 인(仁)이여. 언론(言論)이 격앙(激?)하였으니 당당하다 그 의(義)여”라고 하였는데 삼족당의 인품을 그려낸 것이라고 할 만하다. 기타의 여러 가지 행실은 천목(薦目)에 분명하며 상세하다. 아! 절효선생(節孝先生)의 효는 동물을 감동시키는 효다. 동물 중에 어그러진 것이 호랑이 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호랑이 또한 정성스런 효에 감동하여 길들여진 것이 기르는 개 같았다. 하물며 밝디 밝은 하늘이 굽어 살펴 이에 백록(百祿)을 내리지 않겠는가? 많은 자식을 두어 여섯 장부(丈夫)에 이르렀고, 여섯 장부가 재주 있고 또한 어질었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함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하물며 손(孫)으로 탁영선생(濯纓先生)이 났고, 증손(曾孫)으로 삼족당이 또 났음에랴. 천지의 정영(精英)한 기운이 김씨(金氏)의 일문(一門)에서 자라나 삼대에 이르렀다. 기이하도다. 기이하도다. 혹자는, 탁영(濯纓)이 제대로 죽지 못하였고 삼족(三足)이 온전히 쓰이지 못한 것으로써 천(天)과 시(時)에 탓을 돌리며 김씨(金氏)를 위해 보답이 미흡했음을 말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 부자(夫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사(志士)는 구학(溝壑)에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목이 떨어질 것을 잊지 않는다. 구학(溝壑)에 있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이 군자에게 무슨 병통이 되겠는가? 만나는 바에 따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니 진실로 탁영과 삼족이 우리가 하늘에서 받은 이치를 극진히 함이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일시(一時) 일신(一身)의 불행이, 비록 하늘이 현자(賢者)에게 박하게 하는 것 같으나 만세(萬世)의 이름이 영원히 존재하여 천지와 함께 불후(不朽)하니 그 두터움이 어떠한가? 지란(芝蘭)은 태운 이후에 향기가 나고, 보검(寶劍)은 묻힌 이후에 기운이 솟는 법이니, 나는 탁영과 삼족에 대해 그러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청도(淸道)의 선비가 이미 세 선생을 제사지내기를 백년이 지나도록 하루같이 하였고 또 전배(前輩)가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어서 한 고을을 경계시키니, 모두 기록할 만한 것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兼)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조경(趙絅) 삼가 발문(跋文)을 짓다.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 14)에 돌을 다듬었고 16년이 지난 신묘년(1651, 효종 2) 월 일에 세우다.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 사진 출처 : 불교중앙박물(http://museum.buddhis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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