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_META_TITLE_ 휴관일입니다.


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남계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좌우로 스크롤하시면 전체 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건립연도 155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정여창, 강익, 정온
기타 서원

관찬사료

명종실록, 1566615, 정여창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경상도 함양 진사 강익 등의 장고

경상도 관찰사 강사상(姜士尙) 산업을 경영치 않았으니 청렴 결백은 취할 만하나 국사에 있어서는 특별히 칭할 만하게 수립해 놓은 일이 없다.이 함양(咸陽) 사는 진사(進士) 강익(姜翼) 30여 인이 장고(狀告)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는데, 장고에 아뢰기를,

 

"삼가 살피건대 유선(儒先) 정여창(鄭汝昌) 성묘조(成廟朝)의 명유(名儒)이다.은 바로 우리 고을 사람인데 어릴 적부터 총명이 출중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정여창을 보고 기특히 여겨 지금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정여창은 장성하자 학문 연마에 힘쓰되 읽고 기억이나 하는 학습은 비루하게 여기고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을 지극히 좋아하여 침착하게 연구한 나머지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상시 덕용(德容)이 순후하여 자연 남들로 하여금 심복하고 우러르게 하였습니다.

 

친상을 당해서는 장례나 제사지내는 일을 꼭 예법대로 거행하는가 하면 하루도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을 여막(廬幕)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일찍이 은거할 뜻을 품고 처자를 이끌고 두류산(頭流山) 밑에 가서 집을 짓고는 자연을 즐기며 일생을 마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때 성종께서 추천자의 말을 들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그가 상소를 올려 완강히 사양하자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으며 나는 너의 품행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품행을 숨길 수 없음이 지금 이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너의 착함이다.’ 하였습니다. 정여창은 이에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곧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설서(說書)로 옮겨서 열심히 보도(輔導)하니, 동궁(東宮) 곧 연산군(燕山君)이다.은 그를 꺼려하였습니다.

 

정여창은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자청해 나가서 정사를 베푸는데 인서(仁恕)를 앞세웠고 교화시키기를 마치 신명처럼 하였습니다. 또 사무에 밝았으므로 감히 그를 속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법령을 마련하여 민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더욱이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교화시키는 일을 힘써 봄·가을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고 또 재능에 따라 사람을 가르쳤으므로 성취된 인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끝내는 무오년144) 의 화에 좌죄되어 종성(鍾城)에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중종께서 즉위하여 무죄를 설원하고 승지(承旨)를 추증하였으며, 또 대신의 헌의에 따라, 선생과 김굉필(金宏弼) 선생 성종조의 명유(名儒)로 형조 좌랑에 뽑혔으며 연산군 때 사사(賜死)되고 중종조에서 특별히 우의정에 추증하였다.은 학술이 순정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서로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던 일이 마치 고정(考亭)과 남헌(南軒)145) 과의 사이와 같았으므로 도()에 뜻을 가진 선비들이 많이 그를 흠모한다 하여, 명을 내려 송조(宋朝)에서 염락 제현(濂洛諸賢)146) 을 포숭(褒崇)하던 고사를 모방하여 그가 평일 강도(講道)한 장소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해마다 그 집에 연봉을 주는 것을 영원한 규식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당시 강도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사우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그렇다고 공제(公祭)를 사묘(私廟)에 베풀자니 예()에 근거할 바가 없을 뿐더러 형편 역시 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전에 군수(郡守) 서구연(徐九淵)이 비로소 사우를 세우고 곁에 당재(堂齋)를 설립하여 장차 예로써 신위를 봉안하고 선비를 모아 학업을 닦게 하려 하였으나 그 일을 성취하지 못하였는데 10여 년 후에 와서야 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사우 건립은 실로 선조(先朝)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조정에 품달하지 않고 변조한다면 전일의 가묘(家廟)와 다를 게 없어 제사지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 임고(臨皐) 임고는 영천군(永川郡)의 별호이고 임고 서원(臨皐書院)은 곧 정 문충공 몽주(鄭文忠公夢周)의 사당이다.와 소수(紹修) 곧 풍기군(豊基郡)의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니, 안 문성공 향(安文成公珦)의 사당이다. 우리 나라에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는데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비로소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사당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지내고 재실을 두어 학자들을 거처시켰으며 서적(書籍)과 전민(田民)을 모두 갖추었다. 그는 또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최 문헌공(崔文憲公) ()을 위하여 해주(海州)에 서원을 세우고 이름을 문헌당(文獻堂)이라 하였는데, 규모가 한결같이 백운동 서원과 같았으므로 원근의 학자들이 많이 취학하였으니 혜택을 준 공로가 여간 많지 않다. 이후로 성주(星州강릉(江陵) 같은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서원을 세운 곳이 퍽 많았다고 한다.두 서원은 모두가 한때 옛 어진이를 추모하는 자의 마음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조정의 명이 있거나 또는 사전(祀典)에 실린 것도 아닌데 역시 모두 사액(賜額)하고 반경(頒經)하였으며 겸하여 장획(臧獲)과 토전(土田)을 하사하였으니 은전(恩典)이 지극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사우는 선조의 유지(遺旨)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총명(寵命)의 하사가 어찌 저 두 서원의 밑에 놓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정여창의 학행은 한 고을의 의표(儀表)가 될 뿐만 아니라 학사(學士)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런 때문에 포증(褒贈)의 은전은 선조에서 특별히 높았고 사자(士子)의 추모는 오늘날에 성하게 일어났으니 실은 인심이 다 함께 좋아해서 하는 일로 말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위로 조정에 주달하여 사액 숭장(賜額崇奬)케 아니한다면 끝내는 한 고을 선비들이 사사로 설립한 서원이 될 것이니, 사리로 볼 때 도리어 미안하고 영구히 유지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계술의 효도를 극진히 하시는 날에 혹 정액(旌額)을 하사하여 널리 은전을 펴신다면 위로는 선왕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풍화의 고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그 건의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편액(扁額)과 서책을 하사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였다. 상이 그에 따라 이름을 남계 서원(濫溪書院)이라고 하사하였으니, ()이다. 남계는 서원 곁의 시내 이름이다.

 

사신은 논한다. 서원 설립은 예부터 있어 온 일이 아니다. 남쪽 지방에서 특히 많이 설립하고 있는데 학자들이 거기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장소이니, 사회의 교육을 위하는 면에서 어찌 적게 보탬이 되겠는가. 정여창과 김굉필은 한때의 사우(師友)였다. 학문은 비록 전한 것이 없으나 중종이 추증한 일로 보아 역시 근대의 큰 선비였을 것이니, 서원을 세워 제사지내는 것이 뭐 불가할게 있겠는가. 다만 문제는 이때 소위 선비라는 자들이 양심은 돌보지 않고 분분하게 설립하여 새로운 뜻을 창출하기에 급급하니, 오래갈 수 없을 것 같다.

 

TOP
한국서원 제향인물 동아시아서원 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