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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남계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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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건립연도 155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정여창, 강익, 정온
기타 서원

관찬사료

서원등록, 현종 4(1663) 정월 29, 함양(咸陽)의 남계서원(灆溪書院)에 정온(鄭蘊)을 배향(配享)하는 것을 방계(防啓)하는 건

1. 합천(陜川)의 생원(生員) 조하향(曺夏鄕) 등의 상소에, “함양(咸陽)의 남계서원(灆溪書院)은 일찍이 이미 사액을 하였으니,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을 배향(配享)하여 주소서.”라고 한 일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이 상소의 사연을 보니, ‘함양의 남계서원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을 향사(享祀)하는 곳인데, 본 군()의 많은 선비들이 문간공 정온을 서원 밖에 별도로 세워진 사당에 향사하였습니다. 남계서원은 이미 일찍이 사액을 한 까닭에 감히 마음대로 승배(陞配)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상소하여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정온은 평생토록 대절(大節)이 뛰어나게 우뚝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 그를 존숭하여 보답한 은전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미 용문서원(龍門書院)과 도산서원(道山書院) 두 곳에 배향하였으니, 또 승배해야만 할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일찍이 영남의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에 대한 판부(判付)에 서원을 중첩해서 설치한 곳에는 매번 허락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해조(該曹)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상소의 사연을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서원등록, 숙종 2(1676) 9월 초9

추배(追配)하는 것을 시행하지 않는 건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 “점련(粘連)한 문건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유학(幼學) 정유욱(鄭維稢) 등의 상소에, ‘선정신(先正臣) 정온(鄭蘊)은 도학(道學)의 명맥(命脈)을 전함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고, 정충(精忠)의 절개는 평소의 지조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학문은 정성과 공경을 위주로 하고, 그의 행동은 효성과 우애를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혼조(昏朝)의 이륜(彛倫)이 타락하고 끊어진 때를 당하여 직언하는 상소를 올려 인륜의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을 때에는 임금을 수행하였고, 산성이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여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바위 골짜기에 은거하며 강상(綱常)을 일으켜 세웠고,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 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안음(安陰)의 용문서원(龍門書院)과 거창(居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은 모두 선유(先儒)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 곳입니다. 정온은 이미 단독으로 남계서원(灆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으나, 아직까지 승배(升配)하지 않은 것은 사문(斯文)의 흠사(欠事)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 참봉(參奉) 강익(姜翼)은 선정신(先正臣) 정여창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서, 정여창의 유풍을 흠모하여 그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였습니다. 순정(醇正)한 학문과 효제(孝悌)의 행실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보아도 그의 짝이 될 만한 이가 드뭅니다. 개연(慨然)히 해야 할 도리를 스스로 떠맡아서 서원을 건립하여 정여창을 향사하고, 강학(講學)할 때에도 정여창을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온과 더불어 임시로 세운 향사(鄕祠)에 합사(合祀)할 때에도 두 신하의 혼령으로 하여금 합당치 않은 곳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니, 사림(士林)들이 적잖게 비통하게 여깁니다. 이에 두 신하를 특별히 남계서원에 승배(升配)하고자 이 상소를 올립니다.’고 하였습니다. 정온의 학문과 충절은 진실로 한 시대에 우러러 추앙을 받아서, 이미 안음과 거창에 있는 서원에 배향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선비들의 청원에 따라 함양의 남계서원에 승배하게 하소서. 강익의 도덕과 행의가 정온에 비견될 만하지만, 사림들의 공론이 아직 그 도덕(道德)의 깊이와 행실의 고하(高下)를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미 향사(鄕祠)에 배향하였으니, 사액한 서원에 갑자기 승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합니다. 따라서 이 상소의 사연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159월 초9일에 우승지(右承旨) () 김빈(金賓)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남계서원(灆溪書院)에 강익(姜翼)을 추배(追配)하는 건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경상도(慶尙道) 생원(生員) 양천익(梁天翼) 등의 상소를 보니, ‘명종(明宗) 때의 명유(名儒) 강익(姜翼)은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행실이 독실하며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도맥(道脈)을 정통으로 전하였으니, 한 시대의 유종(儒宗)으로서 백대(百代)의 사표(師表)가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림들이 존경하고 흠모하여 제사를 지낸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향현사(鄕賢祠)에 있고 정여창(鄭汝昌)의 위패를 안치한 서원에는 배향하지 못하여 공론(公論)이 답답하게 여기고 선비들이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액하는 것은 중대한 일로 남모르게 부향(祔享)할 수 없으니, 특별히 생각하여 추락한 은전(恩典)을 속히 거행하여 강익을 남계서원(濫溪書院)에 승배(陞配)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강익은 정여창의 마을에서 태어나 정여창의 유풍을 사모하였는데, 사화(史禍)를 당한 이후에는 연식하며 도학(道學)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서원을 건립하여 정여창을 제향 하였고, 강학(講學)하며 정여창이 힘쓴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를 존경하였습니다. 혼탁한 세상에 우뚝하게 지주(砥柱)가 되어 당시의 훌륭한 신하들이 그의 어짊을 임금께 추천하고 후세의 사림들은 그의 덕을 추앙하였으니, 그가 사문(斯文)에 세운 공적은 제사 지내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남계서원은 본 고을에서 강익이 정여창을 위하여 건립한 곳이니, 선현(先賢)을 배향하는 것은 실로 사리(事理)에 합당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향현사(鄕賢祠)에 있는 것은 참으로 흠전(欠典)이 되니, 특별히 승배하게 해달라는 청을 들어주어 많은 선비들의 바람을 위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28919일에 우승지(右承旨) () 신후명(申厚命)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서원등록, 영조 16(174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