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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충렬사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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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충렬사
명칭 『홍재전서(弘齋全書)』, 卷 184 - 羣書標記 6 - 命撰 2 - 李忠武全書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정조(正祖)
소장정보

상세정보

국가에 충성한 공을 높이 숭상하고 보답하며 무공(武功)을 세운 이를 드러내어 표창하는 것은 옛 선왕들이 세상을 격려하고 다스리는 도구이며 내가 언제나 힘쓰는 일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을 찾아내고 드러내어 빛내어 포상하고 총애하는 증직(贈職)을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지만 큰 공이나 충절을 사람들이 모두 환히 알고 있어서 그러한 이름을 얻어서 부끄럽지 않고 그러한 포상을 시행하여도 과장된 말이 아닌 이를 논한다면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이 가장 드러난 이들일 것이다. 나는 충민에 대하여 이미 묘비의 명(銘)을 짓고 다시 그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모아 인쇄하여 온 나라에 반포하였다.

임자년(1792, 정조16) 가을에 대보단(大報壇)에 참배하여 우리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도와준 중국 황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어 우리나라의 충신까지 기리어, 중국 조정으로부터 도독(都督) 인장을 받은 충무공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계축년(1793, 정조17)에는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하고, 갑인년(1794, 정조18)에는 또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 머리에 전서로 새긴 전례를 본떠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돌을 새겨 묘도(墓道)에 세웠는데 머리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전서로 새기고 명(銘)과 서문(序文) 1189자를 친히 크고 깊게 새겨 왕후(王侯)의 명(銘)에 대신하였다.

그리고 내각에 하교하기를 “충민은 이미 실기(實記)를 인쇄하여 반포하였거니와 충무만은 아직 없다. 충무와 같은 공과 명성이 있는데도 그의 평소 저술과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기록한 글들을 모은 책이 아직껏 없으니 어찌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마침내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에게 명하여 공사 간의 기록을 널리 모아 충무전서(忠武全書)로 꾸미고 첫머리에 전교(傳敎), 하유(下諭), 사제문(賜祭文), 도설(圖說), 세보(世譜), 연표(年表)를 싣고 그다음에 시문(詩文), 그다음에 장계(狀啓), 그다음에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싣고 다시 비장(碑狀), 사기(祠記) 및 후인들의 기술(紀述) 등을 부록으로 6권을 만들어 뒤에 붙여서 을묘년(1795, 정조19)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이어 내탕전(內帑錢)을 비용으로 대어 정유자(丁酉字)로 인쇄하여 혼령을 모신 여러 곳에 소장하게 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致祭)하고, 통수(統帥)에게 명하여 명 나라 조정에서 내린 전서로 새긴 도독(都督) 구첩(九疊) 동인(銅印)과 관방령패(關防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 등을 진열하고 큰 술잔에 술 올려 일을 마치도록 하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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